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경쟁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비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사회적 연대의식은 음지로 숨었고, 과열된 경쟁사회의 결과물인 혐오와 이기주의가 숨을 막히게 한다.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한국 국민에게 교양과 상식이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건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상식 밖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사소한 접촉사고를 빌미로 구급차의 앞을 막았던 택시기사는 누구보다도 구급차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전직 사설 구급차 운전수였다. 그가 구급차로 후송 중인 환자의 위급함을 이론적으로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구급차를 막아섰던 것은 오히려 그런 구급차의 생리를 이용해 더 많은 합의금을 뜯어내려 하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사건들이 벌어졌다. 아이를 학대하다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한 부부, 학교 선배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일삼은 대학생 커플, 최근에는 ‘가스 라이팅(심리적 조종, 정서적 학대)’이란 심리학 용어까지 등장하며 주변인을 함부로 대한 연예인의 이야기까지 들린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다소 거친 문장으로 능력주의 경쟁사회의 병폐를 꾸짖는다. "자신들의 입시 정책으로 성공병 환자들을 양산하고 보상해온 명문대학들은 일단 학생들이 교정에 들어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거의 없다. 선별하고 경쟁하는 본능은 대학 생활에도 뿌리 깊게 침투했다. 대학생들은 받아들이거나 내쫓는 의식을 자기들끼리 만들어낸다. 대학들처럼 학생 조직들도 '우리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며 으스댄다." 그는 대학문화의 이 같은 변화를 대학교육의 변질로 분석한다. "이러한 캄핑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이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대학이 입시 정책으로 '성공병 환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거친 문장에서 대학입시에 대한 샌델 교수의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대학교육을 빗대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으로 바라보고 있다. 샌델 교수의 이 같은 분석은 미국의 대학교육에서조차 더 이상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교양과 상식을 교육하는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에서 높은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줄기차게 일어나는 원인을 분석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난해 7월, 전공의 집단 진료거부 사태와 함께 커다란 이슈로 회자되었던 의대생 집단 국시 거부는 샌델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던 하버드대 학생을 두고 묘사했던 '능력주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상처 입은 승리자'의 한국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공 의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드러나 논란이 되었던 의사협회의 게시물 또한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학창 시절 1등을 도맡아 했던 엘리트 의대생들이 집단 이기주의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론적으로'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경쟁사회의 산물이 그들의 사고 깊은 곳에 뿌리내렸음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의대생은 입시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미 지난 12년간 '불타는 고리를 뛰어서 통과하는' 생활을 반복해온 것도 모자라 의대 입학 후에도 또 다른 상위 1%의 경쟁자들 속에 살벌한 생존경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검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학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전문의 자격을 갖춘 이후에도 팰로우 과정을 또 수년간 거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전문의'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고 한다. 그토록 긴 시간을 버텨왔음에도, 여전히 험난한 과정을 버텨내야 한다. 숱한 노력의 결과 의사'면허'를 취득할 자격을 갖추었는데 갑자기 공공 의대라니! 새로운 경쟁자라니! 의사가 될 수 있는 다른 통로가 추가로 생긴다니!! 공공 의대가 사회에 정말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를 떠나 의대생 입장에서 펄쩍 뛸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에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단지 그들이 새로운 경쟁구도 형성을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의사가 되기 위한 경쟁 해왔기에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는데 서툴 수밖에 없다. 성장환경을 미루어보았을 때 그런 식의 반응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치열한 경쟁의 반작용으로 튀어나온 새로운 경쟁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와 경계를 단순히 밥그릇 문제나 개인의 인성문제로 치부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경계와 저항의 수단이 '국시 거부'라는 것이 뜻밖이었다. 대학생이 자신의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그 배경에는 의사 '면허'제도가 존재한다. 의료행위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면허 없이는 행할 수 없다. 무면허 의료행위는 처벌받는다. 또한 면허는 '자격증'과 다른 성격을 지녔기에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 쉽게 말해 자격증이 일반판매 상품이라면 면허는 한정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한정판을 집어 들기 위해선 값비싼 가격을 지불할 '능력'도 갖추어야 했지만, 그 이전에 한정판 구입에 요구되는 '자격'을 얻어야만 했다. 그 자격이 바로 '의대생'인 것이다.
국가에서 의사면허 수량을 한정시켜두었고, 그 수에 따라 의대별로 정원이 배분된다. 이 같은 구조 아래 의사는 기존 의대생이 아니면 충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의대 자체가 의사 면허의 독과점이 된 것이다. 의대생이 단체로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은 당장 내년도 의사 정원만큼 의사 수를 충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맥락에서 의대생 국가고시 거부는 저항의 수단으로써 효과를 갖게 된다. 당시 의협회장의 발언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정부는 10년 후 공공의사 4,000명을 얻기 위해 당장 내년에 배출될 3,000명의 신규 의사를 잃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의사협회의 회장부터 의대생을 '신규 의사'로 칭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최근 3년(2017~2019년) 의사 국가고시 평균 합격률이 94%가 넘는다는 사실 또한 '의대생 = 신규 의사'라는 특권 의식을 내면화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의사 국시 합격률 95%, 전공 적합성, 성실성 따져 양성해야, 매일경제, 2020.10.12.)
의대생은 '대학 입시'라는 능력주의 경쟁사회의 첫 번째 대관문을 선두로 통과한 의미 있는 그룹으로써 '최초의 승리자'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제 그들은 치열한 분투 끝에 의사로서 첫 발을 내딛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서 있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은 그들에게 의사면허를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대생들은 의사가 아니다. 의대생은 의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의대생들은 이미 스스로를 의사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실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의대생들이 개인적 영역인 국가고시를 당당히 거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결국 국가가 한 발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음에 분명하다. 한국 의료시스템 붕괴에 대한 진지한 우려와 그와 같은 잘못된 의료체계라면 그동안 간구해온 의사의 꿈조차 내려놓겠다는 결의로 시험거부를 선택했다면 어째서 국가에서 제공한 재응시 기회를 덥석 수락하는가. 그들이 말했던 의료시스템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정부는 수많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1월, 2700명의 국시 거부 의대생들에게 재시험 기회를 제공했다. 아직 의사도 되지 않은 의대생들과의 의료공백을 두고 치러진 줄다리기에서 정부가 두 손 두발을 다 든 것이다. 경쟁사회가 몰아준 특권에 정부가 백기 투항한 장면은 소수의 전문가와 기득권 집단에 휘둘리는 정치의 초라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도달한 자의 특권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무너트릴 수 있음을 잔인할 정도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