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의 의의

잘못 쥐어진 권력이 국민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30년

by 작가 전우형

억울함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 쉽사리 내려놓아지지 않는 억울함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못하게 한다.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라고 하지만, ‘용서’라는 두 글자가 쉽게 써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이들은 케케묵은 과거의 원한은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과거는 단순한 원한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독재권력의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뼈아픈 역사는 잊혀서는 안 되며, 그저 지나간 과거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며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를 되새겨보려 한다.




일제 치하의 암흑기를 겨우 벗어난 대한민국은,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곧 미소 열강의 패권다툼의 장이 되어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6.25 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 또다시 폐허가 되었다. 초대 이승만 정권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시기를 틈타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을 자행하며 독재정권으로 거듭났다. 4.19 혁명으로 시민의 뜻이 뭉쳐 가까스로 이승만 하야를 이끌어냈지만, 새롭게 등장한 장면 내각은 정권 교체 후 불과 1년 만에 군사력을 앞세운 박정희의 쿠데타 앞에 무릎 꿇고 만다. 바로 5.16 군사정변이었다. 2년 6개월간 군사통치 기간이 이루어지는 동안,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졌고 정치행위를 감시하고 탄압하였을 뿐 아니라, 언론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중령의 특무부대 요원 3천 명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3년 후인 1964년에는 무려 37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대공업무 및 범죄 수사,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반정부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 통제, 적발에 이용됨으로써 독재정권의 폭압 장치로 기능했으며, 암암리에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여론을 정부에 유리하게 조성하는 등 권력의 말초신경 역할을 수행했다. 제5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출처 : 한국 근현대사 사전)


박정희는 사회가 안정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정권을 맡기고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한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당을 만들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결국 제5대 대통령 당선에 성공한다. 권력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례였다.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3선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등 이승만 독재정권의 행보를 착실히 다시 밟아갔다. 그것은 이름만 바뀐 또 다른 독재정치였을 뿐이었다. 제7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유신 헌법'을 통과시킨다.

유신헌법

1972년 10월 17일의 10월 유신체제에 따라 197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헌법이다. 박정희는 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 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한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확정되고, 12월 27일 박정희가 7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한편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수립되었다. 이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 강화로 독재의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다.

전문과 12장 126조 부칙 11조로 되어 있는 유신헌법은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 기본원칙에 대한 전면 부정과 대통령에게 권력집중과 반대세력의 비판에 대한 원천봉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 법률유보조항을 두어 국민 기본권의 대폭 축소, 통일주체 국민회의 간선에 의한 국회의원 1/3 선출, 긴급조치권 및 국회 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 부여, 6년으로 대통령 임기 연장, 중임 제한 조항 철폐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 국회의 회기 단축 및 권한 약화, 헌법재판소를 헌법위원회로 변경,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 대통령 선거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실시 등이다.(출처 :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일단 유신헌법이 제정될 당시의 상황이 더욱 가관이다.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헌법 개정이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아니고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투표로 확정하라는 얼토당토 안 한 지시가 내려진다. 그 국민투표 결과가 91.5%였다. 이 모든 상황이 유신헌법을 어떤 식으로 통과시켰는지를 표현해준다.


유신헌법의 조항에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독특한 기관이 등장한다. '통일'과 '국민'이라는 문구를 붙여 명칭을 미화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법 개정, 국회의원 선출, 대통령 선거 등을 독단적으로 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토론 없이 무기명 투표로 대통령을 선거하고,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거하였으며, 그 밖에 헌법개정안을 국회 의결 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심지어는 이 회의의 의장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이처럼 유신헌법을 이용하여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법관을 임명할 수 있으며, 헌법조차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한마디로 법 위에 대통령이 있었다. 대통령 중임제한 역시 폐지하였고, 대통령 선거 또한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함으로써 본인이 죽지 않는 한 영원히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입법부를 대표하는 국회의원과 사법부를 대표하는 법관을 '임명'하게 된 것은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을 와해를 의미했다. 독재정치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헌법까지 개정하는 초헌법적인 모습에서 이미 법치주의는 완벽히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유신체제 하에 민주주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다.


박정희가 죽지 않는 한 그의 독재는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독재를 무너트리는 것은 독재 그 자체가 가진 독소뿐이었을까? 언론을 탄압하고 정치행위를 통제하며 박정희 유신정권의 수족 같은 역할을 해왔던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의 배신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는 10.26 사태가 벌어졌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그의 독재정권은 18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군대가 가진 무력이 정치권력화 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군사정변을 통해 이어진 18년간의 유신독재정권이 보여주었다. 그 독재가 배신과 죽음으로 스스로 막을 내리는가 했더니 같은 전철을 밟는 또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사례를 보며 군대가 가진 힘을 악용하는 법을 배운 신군부세력은 또다시 국민들이 위임해준 국민의 무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다. 그것이 바로 '제5공화국'이었다.


제5공화국(1981.3월 ~ 1988.2월)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지속된 한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을 말한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여 수립하였다. 이들은 12월 12일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연행함으로써 무력으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2월 21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신군부세력에게 있었다. 1980년 4월 사북 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은 광주에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제5공확국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이 정권은 부정부패와 민주화운동 탄압, 고문 등의 인권유린행위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마침내 1987년 6월에 일어난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1988년 2월 제6공화국으로 교체되었다.(출처 : 두산백과)


긴 유신정권을 버텨내며 국민들은 군부독재가, 군부 무력이 정치권력화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충분히 인식했다.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 만으로는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또 다른 군부독재가 성립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향상된 시민의식과 또다시 어두운 과거를 되풀이하려는 신군부세력과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계엄군은 전라도 광주 땅으로 향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광주 시민들이 격렬히 저항했고, 신군부는 총칼을 동원하여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만행에 항거하여 일주일 가까이 투쟁했지만 결국 계엄군의 총칼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총구가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쏴"라는 구령 아래 방아쇠는 사정없이 당겨졌다. 이름만 바뀐 유신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혀 국민들의 피는 강이 되어 흘렀다.




박정희는 자신이 필요할 때면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도 마찬가지로 국민이 시위를 일으키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을 향해 총칼을 들이밀었다. 이쯤 되면 '비상계엄령'이 무슨 대통령이 필요할 때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조커 카드처럼 여겨질 정도다. 계엄령은 내란, 반란, 전쟁, 폭동, 국가적 재난 등 비상사태로 인해 국가의 치안유지와 사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과 같은 행정부 수장이 군대를 동원하여 치안과 사법권을 유지하는 조치이다. 계엄령을 인정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계엄령이 비상사태에 대한 일시적인 조치이며 반드시 입법부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지만, 현재까지의 사례에서 보았듯 계엄령은 독재 정권이 반대자를 탄압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이용되어 왔으며, 정치적 수단화되어 왔다. 심지어 박정희는 필요하면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힘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의 손에 쥐어졌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위험과 그것을 견제할 장치가 존재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1988년 제6공화국으로 교체되기까지 전두환 정권은 8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계속해서 퇴보시켰다. 전두환 다음으로 대통령이 된 노태우 역시 신군부세력의 일원이었다. 그 과정에서 6월 민주화 운동을 통해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고무적일 뿐이었다. 1992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5.16 군사정변 이후 30년 만에 민간인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한번 잘못 쥐어진 권력이 제자리를 찾는데 무려 30년이 걸린 것이다.


침묵하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날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자유의 목소리에 찬사를 보낸다. 변화를 향한 꿈틀거림이 파도를 만들었고, 민주주의의 파도는 어렵사리 독재의 배를 침몰시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과도기적 어려움을 버텨내며 고통받았지만, 그 노력이 모여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억압에 눌린 채 노를 젓기보다 스스로의 손으로 헤엄쳐가는 것을 선택했다. 자유를 위한 열망이 권력의 두려움을 뛰어넘었을 때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당당하고 아름답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스러져간 안타까운 영혼들을 마음 깊이 추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군인의 총구가 국민을 향해서는 안됐다. 국민이 쥐어준 총으로 국민을 겨냥했던 가슴 아픈 과거는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교통사고나 재해, 재난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독재에 대항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빨갱이', '간첩', '내란의 주범' 등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닌가. 과거사를 바로잡는 것은 바로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실행되어야 할 사회적 정의다. 그것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건너뛴 지금이라고 하더라도 덮어두었던 과거의 일기장을 펼쳐보아야 한다. 그들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시민들 스스로가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희생을 딛고 건설된 민주화 사회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후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를 공부하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억울함에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상처는 소독하고 고름을 짜 주어야 새살이 돋는다. 과거사를 바로잡는 작업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딛고 새로운 한 발을 더 내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민주주의가 다시 절뚝거리지 않도록, 누군가의 손에 국가 전체가 휘둘리지 않도록 지성을 갖춘 시민으로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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