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재앙이며 무의미하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말살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
전쟁 속에서도 한 송이 꽃은 피어나지만 한번 죽어간 생명은 돌이킬 수 없다.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6·25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이었다. 역사는 기록되어야 하며,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같은 실수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때 ‘골육상쟁’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아이는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총 쏘는 법부터 배워야만 했다.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무심한 총알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심장을 관통하고 메말라있는 땅에 붉은 피를 적셨다.
세상은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무심히 그 붉은 액체를 정화할 뿐이다. 뜨거웠던 피는 차갑게 식어 없어지고, 아픔은 조용히 세상 속에 묻힌다. 죽은 사람은 총알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 서늘한 총탄은 뜨거운 화약에 힘입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라고 재촉한다. 들판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고 사상과 이념의 다툼은 청년들을 죽고 죽이는 전장으로 밀어 넣는다. 군홧발에 짓밟혀 쓰러져간 생명들은 자신의 마지막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지키고자 했을 뿐인데, 결국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전쟁의 역설' 속에 죽음은 당연해지고 공포는 무뎌져 간다. 너무나도 쉽게 늘어나는 죽음의 ‘숫자’는 인간을 '전쟁 부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며, 부족한 숫자를 채우기 바쁜 전략가들은 생명의 가치를 논할 겨를이 없다.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중립적인 대지를 자신의 색으로 채울 수 있을까? 전선을 더 밀고 올라갈 수 있을까? 그래! 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더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일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어!"
결국, 전쟁은 게임이 된다. 죽고 죽이는 데스매치의 서막이 오른다.
재판에서 승소하든 패소하든 양자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진다. 더 불행한 사람과 조금 덜 불행한 사람이 존재할 뿐 그곳에 승자는 없다. 사람의 추악한 면이 바닥까지 드러나는 소송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살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고 수단과 방법이 윤리와 분리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런 곳이 재판장이다.
재판이 그렇듯, 전쟁 역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진흙탕 싸움이다. 전쟁의 마지막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만 즐비하다. 인간성이 말살된 전쟁터에는 쓰레기를 치우듯 무감각한 표정으로 시체들을 정리하는 감정이 마비된 좀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싸움은 하지 않는 편이 가장 현명하다. 2대를 맞고 3대를 때렸다면 내가 이긴 것인가? 상대방이 나보다 더 많이 다쳤다면 내가 승리한 것인가? 상대편이 코피를 흘리고 울음을 터트리면 나는 승자가 되는가? 링 위에선 조금 더 다친 사람과 덜 다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다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상대방이 걸어오는 싸움을 참아왔던 공격성을 분출할 기회로 삼아서는 안된다. 싸움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여길 때, 이제는 싸워야만 한다고 동조할 때, 자신이 누군가를 지켜야만 할 때 우리는 집단 최면에 걸린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거야. 이제 돌이킬 방법이 없어."
창과 방패를 양손에 꼬나 쥐고 반격에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비극이다. 지키는 자의 싸움이라고 해도 전쟁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무력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그만둘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대단히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도 당연하다 여겼던 많은 것들이 크게 휘청거린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은 바늘만 갖다 대어도 펑하고 터진다.
한반도에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 하나만으로도 나라의 경제는 마비된다. IMF 때 휴지조각이 되었던 어음처럼, 주식 역시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작은 땅덩어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얽혀있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지킬 것들이 많아지면 절박해진다. 절박해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떤 일도 벌일 수 있다. 집단 무의식에 폭력이 더해지면 전쟁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 된다.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집단의 생존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전쟁은 끊이지 않아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복하려는 자와 정복당하지 않으려는 자. 그 어느 쪽에 서든 인간은 존엄을 잃는다. 그토록 부르짖는 ‘인권’이 간단하게 무시될 수 있는 여건을 전쟁은 가장 완벽하게 조성해준다. 공포의 가장 마지막 단계였던 '죽음'마저 흔해진 그곳에는 "자유와 평등" 같은 인간의 기본권이 싸구려 이상으로 치부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민간인들과 여성, 아이들처럼 힘없는 이들은 숨 쉬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학살당한다. 대화 대신 곤봉이 날아오는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전쟁은 끝난 이후에도 독재로 이어지기 쉽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안보는 위태롭다. 지금은 각자의 의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전쟁은 나라만 폐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역시 세상 끝까지 퇴보시킨다. 6.25 전쟁 이후 이어졌던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졌던 군부독재는 전쟁 이후 무력이 정당성을 얻고, 정당성을 얻은 무력이 민주주의를 도태시키는 메커니즘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계엄지역을 선포하고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들에게 총을 겨누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총을 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국민들의 희생으로 이뤄온 지금의 민주주의는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 얼마든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의견 발제나 국민청원, 공정한 선거문화와 같은 것들이 과거에는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미 지켜야 할 것들은 무너진 지 오래다. 누가 그 땅을 점령했는가에 따라 색깔이 정해지고 한쪽에 협력한 사람들은 다른 쪽 사람들에게 학살을 당한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 되고, 세상은 흑백논리로 양분되며,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이는 것이 당연해진다. 당연함은 죄책감, 문제의식을 마비시킨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는 누구도 거부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집단 무의식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고, 전쟁의 광기는 그런 소속원들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사망자는 총 47,000,000명이었다. 이어 한반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국제전이었던 6·25 전쟁 역시 1,000,000여 명이 넘는 엄청난 사람이 죽었다.
2차 세계대전 : 47,000,000
6.25 전쟁 : 1,000,000
성수대교 붕괴 : 32
삼풍백화점 붕괴 : 501
세월호 참사 : 304
코로나 바이러스 : 200
1994년 성수대교 붕괴 32명,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501명, 2014년 세월호 참사 304명, 2020년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인명 피해는 200여 명을 넘어섰다. 우리가 참사라고 칭하는 모든 사고들을 더해도 전쟁으로 산화되는 엄청난 인명피해와 비교할 수 없다. 전쟁의 ‘광기’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와 같은 죽음의 쓰나미가 가능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을까.
공격해오는 적에게 대항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버려 뒀으면 하는 바람은 전쟁의 포화 속 한줄기 연기처럼 종적을 감추고 만다. 그래서 의미 없는 싸움은 없다. 의미 없었던 싸움일지라도 그 후에는 ‘대의명분’이 붙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물론 숭고할 것이다. 하지만,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모두 정당한 것일까?"
"내가 총을 겨누고 있는 상대는 누구일까?"
"나는 왜 살인자가 되어야만 할까?"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한 '자각' 없이는 무의미한 싸움의 무한궤도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림자가 적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내가 참아야만 했던 극악한 독칼을 휘두르는 행위를 대신해주는 이에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주홍글씨'를 새긴다. 내가 그토록 터부시 해온 일들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상대방에게 '죄명'을 뒤집어 씌운다. 그들을 비판하며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해소할 수 없었던 그림자의 갈증을 해소한다. 그들을 비웃으며 우리는 다르다 이야기한다.
"적은 누구일까?"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적일까?"
"적을 만드는 것은 누구일까?"
"상대가 먼저 나의 적이 되어 나섰는가? 내가 상대편을 먼저 적으로 규정했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마음이 증오가 되고, 닫아버린 좁은 문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은 문을 두드려야 할 뿐이다. 적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결국 어떤 전쟁도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 전쟁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다.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전쟁은 예방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렇기에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필연적 재앙이다."
꽃은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지만 한번 죽어간 생명은 돌이킬 수 없다.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6·25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이었다. 역사는 기록되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때 같은 실수는 반복되며, ‘골육상쟁’의 역사는 되풀이될 뿐이다.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생명의 귀중함'을 넘어설 수 있을까. 죽어간 이들의 영전에 그들의 희생에 대한 의미를 선물해본들 어찌 그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보상할 수 있으랴.
"무엇을 위해 그들은 죽어가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쟁에 대하여. 인간이 서로 집단을 만들고 싸우는 것에 대하여.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는 국민들만이 이 나라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