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회 - 9

생산자로서의 가치 하락

by 작가 전우형

능력주의 경쟁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소중하다. 모두에게 능력을 발휘할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능력주의 경쟁사회를 지탱할 중요한 전제가 된다. 더불어 능력을 발휘할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전제 하에 경쟁의 결과는 온전히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에 귀속된다. 여기서 만약 능력의 차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쟁사회에서 자신이 누리는 결과는 스스로의 노력에 비례하게 된다.


일단 기회의 평등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서도 충분해 보인다. 의대생에게 국시 추가 기회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국민의 가장 큰 불만은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왜' 추가시험기회 부여라는 고육지책을 강행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타의 국가시험과의 형평성 문제에 대한 지적이 컸다. 더불어 문재인 대통령이 각종 연설에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자주 언급해온 것을 보면 정치적으로도 기회의 평등은 중요한 어젠다로서 공론화의 장에 올라있는 것 같다. 하지만 능력의 격차에 대한 인식은 그 능력이 어떤 분야에 해당되는가에 따라 의미를 달리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체능 계열에 있어서는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다고 흔히 수긍하는 눈치다. 그것은 같은 수준의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타고난 능력에 따라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고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알 수 있다. 같은 수준의 노력을 기울였다면 김연아 선수나 손연재 선수, 혹은 손흥민 선수나 류현진 선수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거라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선천적 능력 차이에 대한 인식은 예체능 분야에서 학습분야로 넘어가면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특히나 한국인들은 평균적으로 공부머리가 좋다는 민족적 신념 때문인지 '공부'에 대해서는 타고난 능력보다 노력의 차이가 결과를 판가름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학력과 학벌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발전한다. 명문대 간판은 치열한 노력의 결과라 여기고 고졸자는 학창 시절 공부도 안 하고 놀았다는 편견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진실로 능력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고 그 사람의 성적과 학벌은 그의 노력의 정도를 온전히 반영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만큼이나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의 평등은 갖추어졌을까? 예를 들어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서 공부한 사람과,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공부한 사람. 이 두 사람의 성적 차이는 노력의 정도를 온전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출발선'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다르다는 인식이다. '흙수저, 금수저'와 같은 용어가 사회에 등장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힘겨운 노력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며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렇다 해서 학생들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그들을 철저한 능력 주의자로 만든다. 과거 청교도 선배들처럼 그들은 성공이 노력의 산물이라 믿는다.(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p.108)


치열한 입시경쟁의 배경에는 치열한 시장사회의 경쟁이 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에는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p.109)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를 씀'. 노력은 사전적 정의에서부터 성실함이 물씬 풍긴다. 노력 자체가 가진 의미는 도저히 폄훼하기 어렵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이 달콤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오히려 가장 정당해 보인다. 여기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기 어렵다. 따라서 노력에서 뒤처진 사람이 썩은 열매를 가져가거나 아예 아무런 열매도 구하지 못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결과로 여기게 된다면 이것은 과도한 비약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귀결일까?


이러한 흐름은 경쟁의 과열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어느 정도 수준의 노력만으로 원하던 목표에 다다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그 공을 온전히 자신의 노력에 두지 않을 수 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노력의 수준이 처절하다는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겹고 괴로운 것이었다면 샌델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그는 도저히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불어 자신의 성공에 운이나 우연과 같은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들인 엄청난 노력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든 성공일수록 그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신성시하게 된다.


시장에서의 가치가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에게 달콤한 열매가 주어지는 것은 노력의 결과물과 시장에서의 요구가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주급 7억을 받는 유명 축구선수가 들인 노력과 노동의 가치가 그의 엄청난 주급에 비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축구 능력이 교수나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능력보다 700배의 가치(주급 7억과 주급 100만 원의 차이)를 지녔다고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1주 동안 축구경기에서 수행한 노동이 13년 5개월 동안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친 노동, 혹은 13년 동안 병원 간호사가 환자를 돌본 노동과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축구에 필요한 운동신경이라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도 운이지만, 그의 엄청난 축구실력에 주급 7억을 제공할 수 있는 스포츠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도 운이다. 축구실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온전히 그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시장에서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그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시장적 수요가 그의 몸값과 맞아떨어진 우연의 결과인 것이다.


돈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질되면서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노동활동의 시장적 가치만 상향 평가되고 있다. 최근의 코인 광풍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실물경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코인 거래 활동이 때때로 큰 이윤을 창출한다고 소문이 돌면서 계좌 개설이 급등하고 코인 거래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30-40이 주식과 부동산이라면 20-30은 코인이라는 말도 세간에 떠돌았다. 20대 젊은이들이 정당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나가기보다 코인 광풍에 열광하는 것은 돈이 목적이 된 사회에서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동의 가치가 시장적 가치와 비례한다면 돈이 되는 노동활동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뛰어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코인 거래가 큰 수익을 벌어다 준다고 하더라도, 도박장 운영이 돈이 된다고 하더라도, 시세차익을 노려 주식과 부동산을 사고파는 행위가 높은 수익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시대 자영업자의 대출이 늘어 금융권 수입이 큰 폭으로 늘어났더라도, 해지펀드가 기업을 싼 값에 매수해 비싼 값에 매도하는 방식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더라도, 이런 활동을 들어 사회적, 도덕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들의 노동이 높은 시장가치로 인해 고평가받으며 그 수혜를 통해 소비자로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다른 종류의 절망에 빠진다. 돈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해서 진실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경쟁사회가 빚어낸 돈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내면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시장적 가치가 노동의 가치로 느껴지고 마는 모순적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절망의 정도, 즉 결과의 불평등 정도에 따라 더 큰 자괴감을 유발하고, 자신의 노동가치, 즉 생산자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도록 유도한다. 경쟁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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