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능력 차이를 간과하면 경쟁의 결과물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고 강하게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경쟁사회에서 '노력 신앙'을 형성하고, 사회체제가 선물한 달콤한 열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와 더불어 노력 신앙이 형성된 사회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부, 명예, 권위와 같은 달콤한 열매가 그들의 성실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부수적인 역할도 한다. 그들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남다른 삶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맥락에서 경쟁의 승리는 그저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강박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경쟁을 과열시킴과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 부정행위와 편법을 유도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승부사들을 양산하는 역할을 한다. 경쟁에서의 승리에 너무 큰 의미가 부여되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들이 무의식적인 정의의 누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정행위가 난립할 뿐 아니라 양심을 지키고 선의의 경쟁을 하고자 노력하는 이를 두고 우둔하다거나 요령 없다는 식의 평가가 이어진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진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타인을 비방하고 헐뜯어 그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흑색선전에 더욱 골몰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적용하지도 못할 높은 도덕적 기준을 상대방에게 적용해 그의 결점을 부각하는데 사활을 건다.
우리는 이 같은 문제들을 사회 곳곳에서 대면하고 있다. 찬란한 학벌과 전문직으로서의 경력을 쌓은 이들이 모인 정치판에서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이전에 상대 후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고 부족한 사람인지부터 말을 꺼낸다. 때로는 해당 후보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을 더 많이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국정감사 기간 중 무려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간을 법무부 장관 아들의 휴가 연장 특혜에 관해 입씨름하는 모습에서는 국회에 대한 실망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같은 내용을 끊임없이 반복하는지 듣다가 귀가 멀 지경이었다. 이런 정치판에서 무능한 정권 심판론으로 출발하는 정치선전 레퍼토리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국민의 '정치 염증'을 유발한 것이 경쟁사회의 비틀린 결과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경쟁사회의 극심한 부작용은 기득권층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치열한 분투 끝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는 데 성공한 그들은, 자신의 노력을 '충분히' 보상받길 원한다. 이처럼 강한 보상심리는 공고히 쌓아둔 성벽을 누구도 허물지 못하도록 보수하고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한다. 공정한 경쟁보다는 그들이 나를 앞지르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누르기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데 골몰한다. 예컨대 '스탠더드 오일 인터스트리'로 시작해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독점했던 석유왕 록펠러처럼 무자비한 기업인이자 악덕 재벌기업의 전형이 되어가는 것이다. '최선'이라는 단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과 동의어가 되어 왔는지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경쟁이 억압을 부추기는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면 경쟁사회의 현실 적용 단계에서 이 두 단어가 특별한 차이를 보일 수 없게 된 것은 새삼 특별할 것도 없다.
기득권의 저항은 검찰개혁 진행과정에서도 확연히 나타났다. 칼을 휘두르기에 여념 없는 검찰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개혁의 중심에 섰던 한 일가가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을 보았다. 슬픈 사실은 그들에게 개혁의 불똥이 튀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사방에서 퍼부어대는 검찰 포화 속에서도 해당 일가가 작은 저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이 일반 소시민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한 권위를 쌓아온 일가도 검찰 포화에 사정없이 스러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만약 그 대상이 일반 시민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두려움 섞인 상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장가치가 높은 노동이라고 해서 사회적,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전문지식과 기술의 축적만큼이나 우리는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며,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부모가 아이를 잘 돌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풍요롭고 발전된 사회에서 당연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면, 현시점에서 살펴볼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습득하고 계발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 나, 타인,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성을 쌓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식과 기술에서 윤리, 상식, 도덕이 배제되었을 때,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무시되었을 때 그 위험성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인간의 심리에 정통한 사람이 누군가의 심리적 취약성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갈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생’의 윤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부를 증식시키는데 혈안이 된 사람은 희대의 금융사기를 통해 수십 년간 피땀 흘려 모은 종잣돈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게 만들 수 있다. 사건의 피해자들은 끔찍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타인과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 불신에 불을 붙일 것이다. 경쟁사회가 점차 불신사회와 혐오 사회로 이어지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다.
최근 LH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동산 투기로 수백 명의 공무원이 줄줄이 엮여 나오는 사건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상실된 사회상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돈이 목적이 된 사회에서 부동산은 최고의 돈벌이 수단으로 그 지위를 공고히 굳힌 지 오래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신념이 공직자들마저 한탕주의에 물들이고, 토지 보상금을 잘 회수하면 평생 공무원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는 상황에서 '토지개발 정보'라는 꿀단지의 마력에 현혹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스스로 평생 동안 공무원으로서 누릴 생산자로서의 가치를 부동산이 가진 시장적 가치로 짓밟아버린 꼴이 되었다. 부동산 투기과열을 잡아보려는 정부의 시도를 유명무실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내로남불'의 정서를 확인시킴으로써 대중의 분노에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는 오히려 부동산이 어쩌다 최고의 돈벌이 수단으로 자리 잡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더욱 어렵게 했다. 분노의 방향을 정보의 격차를 이용한 비양심적인 활용의 문제로 돌려버렸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여전히 돈이 목적이 된 사회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8년간의 계류 끝에 이해충돌 방지법이 지난 4월 29일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법에 명시된 것처럼 자신이 직접 그곳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직계 존비속이 아닌 여타의 지인을 활용해 정보를 은밀히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은 증거가 남지 않고 수년간의 재산과 부동산 소유의 변동을 신고하도록 법안에 명시되었지만 세무 회계 전문가를 은밀히 통하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투자의 결과물을 나눠갖지 못할 것도 없다.
지금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LH 사태의 본질은 단지 청렴해야 할 공무원이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이용하여 부당한 수익을 얻으려 한 데 있지 않다. 그 이면에는 경쟁사회의 비틀린 결과가 돈을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질시켰고, 부동산은 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 되었으며, 이런 형태의 무의식적인 '정의의 누수'를 청렴성이 강조되어야 할 공직사회에서조차 스스로 경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진짜 문제'가 존재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경쟁에서의 승리를 골몰하는 이들에게 준법정신을 발휘해 '이해충돌 방지법'의 제정 목적을 수호해달라는 외침이 지극히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법의 빈틈을 후벼 파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새삼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정의가 새어나가는 것을 살필 겨를조차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를 돌아볼 수 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성찰은 현재를 통해 과거를 고찰하고 미래를 추론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사고방식이다. 지식과 기술은 인간이 모여, 토론과 연구, 학습의 과정에서 발전된 유용한 결과물이다. 여기에서 성찰의 역할은 결과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뿌리를 살피는 것에 있다. 비판적 사고란 당연함에서 한걸음 멀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기 이전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왔고 사회를 형성해 왔으며,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질문은 지식의 동토층에 매몰되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미 많은 것이 충족된 사회가 존재한다. 과도하게 풍요로워진 세상에서 생존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경쟁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실존한다고 해도 그것은 만족과 불만족의 차이로 치부되고 만다. 불평등에 대한 시각이 불만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한 진지한 생존의 문제로 공론화의 장에 서지 못한다. 이것은 현실세계와 인식된 세계 사이의 괴리가 점점 더 커짐을 의미한다. 코로나 시대에 곳곳에 망해가는 자영업자나 직장을 잃는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대기업의 성과급 논란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백화점에서는 사치품 매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다. 등급이 나뉘고 차별과 차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쟁사회에서 그 구성원들은 서로의 운명이 공유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한 배를 탄 운명임을 망각하고 각자 구명보트를 끌어안은 채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에서 뛰어내릴 시점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성찰은 이러한 사회의 비틀림을 교정하는 과정이다.
경쟁사회에서 질문은 ‘낭비’로 여겨진다. 특히 성찰적 질문은 더욱 그렇다. ‘쓸데없는’ 질문할 시간에 이미 체계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최선’이고 '효율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궁극적으로도 "그게 네 인생에 더 도움이 된다"라고 배운다. 놀아야 할 나이의 아이들에게 "놀면 바보 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내뱉어진다. 경쟁사회가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해 파이를 키울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자극된 인간의 이기심은 연대나 배려, 함께 사는 사회의 가치를 저물게 함과 동시에 개인의 태양만을 찬란하게 띄웠다. 이런 비틀린 결과는 경쟁 과정에서 성찰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성찰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인문학에서 말하는 ‘비판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간혹 접하는 오해처럼 비판적 사고는 사사건건 딴지를 걸거나 비방하고 비난하는 태도가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해도 ‘정말 그러한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근거’가 중요시된다.
한 예로, 독일 교육은 ‘비판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반대의견을 제시하거나 그런 식의 반응을 선생님들이 독려할 정도로 비판적 사고를 강조한다. 독일에 이런 교육방식이 정착된 배경에는 과거 극단적 파시즘의 일종인 나치즘에 온 국민에 선동되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유대인을 학살로 몰았던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이 존재한다. 더불어 무언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방식이 국민에게 일반화될 때, 그 강력한 무의식이 제국주의, 기술과 접목되면 어떤 인류적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독일인들의 뼈저린 성찰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성적 중심의 능력주의 경쟁사회,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체제에 기반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경쟁의 부작용과 무의식적인 정의의 누수를 스스로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삶에서의 나, 환경에서의 나, 관계에서의 나를 찾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해본다면 경쟁사회의 비틀림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좋은 사회,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