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증거가 남지 않지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위해 신호대기 중이었다. 왼쪽에서 직진 차량이 다가왔다. 좌회전 신호가 켜졌을 때 다가오던 직진 차량에게는 정지신호가 켜졌다. 직진 차량은 멈춰 섰고, 나는 안전하게 좌회전할 수 있었다. 규칙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신호가 없는 교차로에서 기본 원칙은 '일단정지'다. 일단정지 후 주변 상황을 살핀 후 교차로를 지나쳐야 한다. 우선순위가 없는 상황에서 순서가 발생하는 것은 법이 부여한 정당성 때문이다. 관할권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법을 준수한 쪽이 정의가 된다. 교통사고의 책임소재를 따질 때 법을 더 준수한 쪽이 과실률이 낮아진다. 같은 상황이라도 적용되는 법이 다를 경우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입법이 중요한 이유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은 곧 정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법무부가 ‘Ministry of Justice’로 표기되는 것처럼 법은 어느 쪽이 정의에 더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기준이자 잣대가 된다.
한편, 법이 진실로 정의를 판가름할 잣대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의문의 가장 큰 원인은 종종 사람에 따라 법이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사람을 차별한다는 말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법은 그저 법일뿐이다. 법을 만든 것도 사람, 법을 집행하는 것도 사람, 그리고 법을 준수하는 것도 사람이다. 결국 법이 사람을 차별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입법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될 내용이 반영되었거나, 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이가 입맛에 따라 법을 취사선택하여 적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증거가 남지 않는다. 양심과 도덕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악한 마음을 갖고 접근했더라도 증거가 남을만한 피해를 상대방에게 입히지 않았거나 실질적인 범죄 행위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혹은 실행했더라도 어떠한 입증 가능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범죄의 성립이 불가능하고,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대로 하자’는 정서가 만연하는 사회는 그래서 위험하다. 법은 인간의 행동을 단속할 뿐 양심과 도덕을 단속하지는 못한다. 법을 정의라고 믿고 따르는 한 법으로 처벌받지 않을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위장되거나 포장될 수 있다. 그 기간이 오래되고 사례가 늘어날수록 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 행위는 해도 되는 것으로 둔갑한다. 그 행동이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거나 마음속에 찜찜함을 남기더라도 증거가 없는 한, 보는 사람이 없는 한,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한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범죄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과 그 근거로 작용하는 실제 사례는 법의 확장에 대한 정당성에 힘을 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