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도덕
강제력은 양심과 도덕이 갖지 못한 강력한 힘으로 법의 실효성을 뒷받침하는 막강 권한이다. 양심과 도덕은 측정 불가능할 뿐 아니라 평가 내릴 수 없다. 가치관, 인생관, 사생관, 국가관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도 한다. 양심과 도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좋은 교육은 양심과 도덕을 일정 수준으로 완성시켜준다.
환경은 양심과 도덕의 관문이다. 성장환경은 1차적인 양심과 도덕 교육의 통로가 된다.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는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교육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약자 도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무능력을 죄악시하는 문화에서 성장한 아이에게 약자는 응당 자신의 무능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교육이 경쟁을 부추기는 현재 상황에서 거리를 둘 수 있는 탈출구 또한 교육이다. 좋은 교육은 사회와 자신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깊은 눈을 길러준다. 때때로 환경이 부정적 경험을 제공하더라도 그 세계를 여러 시각에서 분석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면 편향, 편견, 고정관념 등으로 기울어진 세계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현재와 같은 경쟁사회에 대한 성찰은 논박을 통해 양심과 도덕의 균형추가 되어줄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도출할 수 있다.
경쟁구도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한다는 것. 승자와 패자는 경쟁구도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 승자는 능력보다 많은 것을 갖고, 패자는 그가 충분히 누릴 것도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 배분의 격차는 승자와 패자 간의 실질적인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 승자의 권위는 온전히 그의 능력에 의한 대가가 아니라는 것. 태어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사회 구성원에게 빚을 진다는 것. 약자에 대한 배려는 기분 내킬 때 하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필수적 행위라는 것. 승자가 오만에 빠지거나 패자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
예를 들면 이런 것과 같다. 수능 혹은 내신점수로 등급과 서열이 나뉘고, 그 자료는 대학 입시지원생의 입학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된다. 이러한 경쟁시스템의 결과로 대학 입시에 성공하는 경우와 실패하는 경우가 나뉘지만 이것이 두 학생 간의 격차를 실질적으로 반영한 결과는 아닐 수 있고, 입시 관문에서의 성패로부터 이어지는 학벌적 스펙 또한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성찰은 양심과 도덕의 필수 요소이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수준의 탐구다. 세상 일에는 분명 원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뒤섞여 결론 내리기 어려운 것도 많다. 때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인이 진짜 원인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길을 건너던 사람이 차에 치어 사망했다면, 표면적 사실은 자동차가 사람을 치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은 다음 단계에 대한 확인에 들어간다. 보행자는 신호를 준수했는가? 무단횡단이었는가? 혹은 횡단보도였는가? 운전자는 전방주시의무를 충분히 이행했는가? 제한속도는 준수하였는가? 주행 신호였는가, 정지신호였는가? 법에 명시된 내용을 기준으로 책임소재를 가리고 처벌 수위를 정하기 위한 질문들이다.
성찰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다음 단계의 탐색을 요구한다.
보행자는
왜 그곳에서 차에 치었을까?
왜 신호를 준수하지 않았을까?
왜 무단횡단을 했을까?
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횡단보도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운전자는
왜 보행자를 미리 확인하지 못했을까?
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정지하지 못했을까?
왜 제한속도를 준수하지 못했을까?
왜 정지신호에 멈춰 서지 않았을까?
엄밀히 말해 법은 이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던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는 답이 없다. 답을 구한다 해도 당시의 상황이나 시스템과 연결시키기 어렵고, 증명이 어렵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법으로 심판할 수 없고, 재판 과정에서도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본질로 다가가는 질문은 법을 집행하는 데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이 사건의 본질은' 법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 않다 보면 당연해지고 습관으로 고착된다. 더 불우한 현실은 사실관계를 밝혀내는데도 공수가 부족하다. 그러니 그가 왜 그랬는지를 따질 여력도 없다. 결국 어느 정도는 범죄심리와도 연결될 이 같은 영역은 수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전문 프로파일러의 업무영역일 뿐 법의 일반적인 영역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진실 여부와 별개로 증명 가능한 증거는 법정에서 인정되는 모순을 목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한다. 증명 가능한 증거가 진실이 아닐 수 있는가? 글쎄... 인간의 자유의지는 법으로 막아내기 어렵다. 그 자유의지, 혹은 집단의식이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들고자 한다면 증거가 증거를 만들고, 상황이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조작은 범죄이지만 조작 사실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큼은 진실의 무게와 동등한 힘을 갖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막을 힘도 없다. 특히 나와 같은 일반인에게는.
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 있다. 증명할 수 있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기반으로 한다. 눈은 가장 신뢰하는 감각기관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인식할 때 왜곡된 진실은 내면 깊숙이 침투한다. 예전에는 눈으로 확인한 것이라 해도 기억의 불확실성과 왜곡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진실의 증명력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이제는 CCTV로 녹화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여겨진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자동차가 도로에서 사람을 치었다', 딱 거기까지다.
마음은 증거가 남지 않으며, 생각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보이는 세상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마음과 생각은 신을 제외하면 자기 자신만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성찰과 참된 교육은 양심과 도덕을 성장시켜준다. 그리고 양심과 도덕은 마음의 판결문에 담을 내용을 결정하는 소중한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