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감정에 대한 문제들은 주로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내재된 욕망과 억압된 감정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며, 대응하기도 어렵다. 날아오는 공을 노리고 헤딩을 하면 득점으로 이어지지만, 공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모른 채 머리를 맞으면 뇌진탕으로 쓰러진다. 두 가지 모두 공과 머리가 서로 부딪힌다는 사건은 같지만 그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과,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감정의 문제들은 정확히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자신이 ‘어떤 감정에 취약하고, 어떤 순간에 얼어붙으며, 어떤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폭발하는지, 주로 누르고 살아가는 감정은 무엇인지, 현재의 환경에서 내가 가장 스트레스받는 때는 언제인지’와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계속해서 축적해두지 않으면 마음에서 솟구치는 펀치에 뇌가 세로로 흔들리고 이성이 마비되고 만다. 동일한 상황에 끊임없이 놓이다 보면 왠지 한계에 부딪힌 것 같고, 이것은 자신에 대한 책망과 실망으로 이어진다.
복수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복수는 때때로 극단적인 상황을 만든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은 절망과 더불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불륜은 수십 년간의 사랑을 불태워 한낱 재로 흩어져버리게 하며, 서로를 바라보던 눈길에 사랑 대신 증오를 꽂아 넣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마음속은 분노로 불타오른다. 믿음, 신뢰, 유대와 같은 관계에서 피어나는 꽃들에 무심해지고 고독만이 최선이라 단정 짖는다. 그동안 쌓아왔던 보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에 대한 불신, 인간의 탈을 쓰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잔혹성을 장전한 피로 물든 마음은 이미 인간성을 모두 불살라버린 증오로부터 비롯된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모든 종류의 복수의 끝은 결국 자신을 향한다는 점이다. 재판장에 원고와 피고는 있지만 승자는 없는 것처럼 복수에는 영광 어린 승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죽이기 위한 독배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되고, 주위를 가득 채운 독향은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주지 않는다. 복수는 복수를,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부르고, 먹잇감을 잃어버린 죽음은 끊임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를 재물로 삼을 뿐이다.
감정을 자신을 잡아먹는 괴물로 키우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 감정을 항상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보살펴야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정의 '그림자’가 있다. 이 그림자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대표한다. 대외적으로 밝은 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일수록 더욱 짙고 어두침침한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림자는 억압된 감정들이 뭉쳐 만들어진다. 평소에 다스릴 수 있었던 괴물들이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극한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순간은 누군가가 자신의 뿌리 깊은 무언가를 건드릴 때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도 같다.
우리에게는 분노를 표출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눌러야만 한다고 스스로 결정짓던 순간들이 있었다. 수시로 친구들과 비교하며 나를 무시하던 엄마에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이 나 때문이라며 없는 사람 취급하고, 술만 마시면 뭔가를 집어던지던 아빠에게도 그저 참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리고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아이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숨죽이고 사는 법부터 터득한다.
이런 유년기를 거친 사람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돈을 벌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사고과와 승진 등을 빌미 삼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수시로 나를 무안 주는 직장 상사에게도 그저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이를 악물고 평범함을 가장하며 버텨야만 한다. 하지만 웃음 속에 눌러두야만 했던 모난 감정들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진한 농도로 응축된 그림자가 되어 나보다 약한 상대를 만나면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받은 학대가 자식에게 대물림되거나, 새로이 입사한 신입사원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은, 억압되어온 그림자가 자신도 모르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파괴적인 감정을 표출할 수밖에 없게 된 이면에는 필연적인 곡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은 상대방이 있고, 분노로 치를 떨게 만든 사건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순간을 시시때때로 마주하지만 매번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나칠 때도 많았다. 충분히 인내할 수 있었고, 극심한 감정이 휘몰아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이처럼 동일한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반응이 사뭇 달라지는 것은 상황과 반응 사이에 또 다른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을 느낀다. 시선이 가는 곳이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며,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모두 차이가 있다. 이것은 각각의 개체에게 부여된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서로 간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다양한 개체들은 서로 균형을 이룸으로써 세상을 완성시킨다. 이 균형은 대단히 아슬아슬한 것이어서 한 가지 요소가 무너지는 것만으로도 큰 위기에 직면한다. 간단한 예로 먹이사슬에서 어느 한 계층이 멸종하면 시스템에는 누수가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한다. 개구리가 사라지면 곤충들의 개체수가 급증하고 포식자 역할을 하던 뱀의 개체수 역시 줄어든다. 이것은 또 다른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온실효과로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며 대륙의 면적이 달라진다. 좁아진 대륙으로 모인 생명체들은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한다. 삶의 터전에서 평균 고도가 높아지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들도 수시로 우리를 위협해올 것이다. 때로는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온지구를 덮으면 태양에너지가 차단되고 지구에는 빙하기가 오기도 한다.
이처럼 지구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천혜의 환경을 제공해주는 가이아 시스템 역시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유지되고 있다. 급격한 변화는 단지 그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구라는 환경은 너무나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치타가 점점 사라져 가는 이유는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갖추지 못한다. 이것은 곧 어떤 종류의 치명적인 질병이나 바이러스 하나로도 그 종이 멸종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병 양상이나 병세의 경중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기저질환을 이미 갖고 있던 계층과 60대 이상 고 연령층에 특히 치명적이었으며, 저 연령층 일수록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낮았다. 때로는 무증상자도 있었다. 개체의 다양성이 유지될 때는 이처럼 각자의 반응에 차이가 있지만,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코로나, 메르스, 사스와 같이 치명적인 바이러스 한 번에 대부분의 사람이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다. 마치 유럽인들이 내장해간 전염병들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양성을 잃어버렸던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왕족들은 수명이 짧았고 병사하는 일이 많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사촌, 조카, 이모, 삼촌 등 친족 간에 결혼을 하는 근친혼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친인척 간의 결혼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의 신라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의 영향이었다. 골품제 내에서는 성골과 진골만 왕족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통일신라 후기 왕들에게는 각종 유전병이나 괴질환을 앓는 일이 많이 일어났고, 병약했으며 수명이 짧은 경우가 많았다. 유사한 유전자들 간의 조합만이 이루어지면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질병과의 싸움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에는 이처럼 왕들의 잦은 죽음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신라대에 여왕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왕족들 중 아들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던 것을 보면 당시의 신분적 폐쇄성이 얼마나 견고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건강한 문화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다. 독재는 피라미드 구조의 꼭대기에 존재하는 한 사람과 하나의 사상, 문화 등으로 획일화시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말살시킨다. 다양성의 상실은 언제나 약화를 부른다. 획일화된 사상은 ‘이견’을 용납하지 못한다. 독재는 모두의 입을 닫아버리게 하고, 한 사람의 목소리만 진실이 되고, 진리로서 추앙받는다. 그래서 스스로의 약점을 보지 못하고 생각과 판단의 균형이 무너진다.
독재자의 독단과 무력에 짓밟혀 공포에 잠기고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은 영혼 없는 인형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독재체제 하에서 사람은 하나의 부품으로 여겨지고, 종래에는 인격도 인간성도 잃어버린다. 체제와 집단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은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어떠한 일도 자신이 아닌, 집단이 하는 것으로 느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인원은 400만 명이었고 그중 70퍼센트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의 말살은 나치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일 뿐,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는 그저 당의 엄중한 명령에 따를 뿐이다.' 사람을 살상하는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버튼을 기계적으로 누르고, 죽은 포로들의 물건을 재활용하고, 태연히 금니를 뽑아 녹여내는 생체 인형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내부에서도 민주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감정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독재자가 나타날 수 있다. 흔히 긍정적인 감정,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터부시 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병증으로 자리 잡은 것일 뿐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희로애락'은 인간이 필수적으로 느껴야 할 감정이며 이 중 어느 하나가 과도하게 기능하거나,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좋은 현상이 아니다. 한쪽을 억압함으로써 지렛대가 기울어지면, 다시 균형을 되찾을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기울어진 상태인 것을 모르거나, 그 상태가 가져다줄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쏠림 현상은 심화되고, 결국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계속해서 무시된 감정은 완전히 느낄 수 없게 되고 이런 무감정 상태 하에서는 자신에 대한 것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유는 모른 채 마음속에 납덩이가 들어선 것처럼 숨통이 꽉 막히고 답답해지게 된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지는 이유는 각자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관점, 태도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도 상황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다른 것은 당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상황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관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일관된 모습만을 철저히 보여주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들이 일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편안한 공간, 예를 들면 집이나 가족, 오래된 연인 앞에서는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하거나 일탈적인 행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것은 억압된 욕망의 분출 때문이다.
억압된 에너지들을 해소시켜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품 안에 폭탄을 한 아름 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누군가 무신경하게 던진 불씨에 불이 옮겨 붙는 순간 응축된 에너지는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 따라서 이것을 안전하게 해소시킬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후회만 남을 상황을 줄이기 위한 핵심 열쇠다.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나 서로 간에 불거진 갈등을 수시로 해결해주면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때때로 가끔 사소한 다툼이 이어지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다. 서로 다른 존재 사이에서 아무런 잡음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 누적된 응어리들의 존재를 알아차려야만 한다. 그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모르는 폭탄과 뇌관이 존재하고 있다. 작은 갈등은 잠시 다툰 후 화해할 수 있지만 어쩌다 한 번 분출한 화산은 화산재가 하늘을 가리듯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갈라놓기도 한다.
사소한 갈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서로 간의 대화채널이 단절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건넨 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감정만 상하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꼬아 듣거나,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 듣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만 있다면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말해봐야 뭐해. 그냥 참고 말지. 긁어 부스럼이야.’ 이런 생각에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 자체가 싫어진다. 하지만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부터 시한폭탄의 타이머는 작동을 시작하며, 관계는 언제 내려앉을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위태로워진다. 나와의 소통 못지않게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