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에 대하여

부끄러움을무릅쓰고

by 작가 전우형

내가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은 마음속 분노에 불을 지핀다. 분노에는 몇 가지 땔감이 필요한데 피해의식이 그 땔감 중 하나가 되어준다. 분노조절장애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화에 대한 당위가 성립되길 바란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믿음이 뒷받침될 때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자신을 덜 자책할 수 있어서다.


부끄러운 예시


나는 마지막 남은 퇴직금을 털어 집을 샀다. 퇴직금보다 더 많은 양의 대출은 덤이다. 33평 아파트의 방은 3개다. 식구는 다섯. 곧 중학생인 딸에게 방 하나, 아직은 고만고만한 초등생 아들 둘에게 방 하나, 마지막으로 아내와 내가 쓸 안방. 이렇게 용도를 구분했다. 사실 작더라도 나만의 서재를 꾸미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수긍했다. 속 좁은 아빠가 되기 싫어서였다. 이미 불퉁거리는 표정에서 속내는 들키고 말았겠지만.


안방은 붙박이장, 침대, 책장, 책상, 컴퓨터 등 아내와 나의 물건들이 배치되었다. 기다란 책상은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아내의 차지가 되었다. 용도를 뚜렷이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늘 두터운 책과 인쇄물, 논문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최근에는 온라인 미팅 소요도 많아진 아내가 그곳에 자리를 펴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고 당위도 충분했다. 결국 내게는 책 2권 펼쳐두기도 비좁은 간이 책상 하나가 남았다. 뭔가 좀 허탈했다. 새로이 집을 사며 구상했던 미래와 너무 다른 현실이라서 그랬던 걸까? 접이식이라 이동은 편했다. 원하면 베란다로 가지고 나갈 수도 있었다. 책상다리는 X자 형태여서 다리를 뻗을 때마다 정강이가 부딪혔다. 그래도 만족하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자기 집이 있다는 게 어디야. 그런 언어로 자조하며.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가정불화의 직격탄이 될 직접적인 언쟁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몇 가지 감정들이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그 감정들은 아이들의 몇 가지 성숙하지 못한 생활태도와 말투 등을 촉매로 현신했다.


불화의 촉매들


아이들이 안방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학교를 다녀와서 씻지도 않은 채로 안방 침대를 뒹굴었다. 나는 그런 행동을 꽤나 신랄하게 지적했다. 최소한 옷은 갈아입고 손발은 씻고 누워도 누워야지 하며 아이들을 최소한의 양식조차 없는 사람으로 비난했다.


또 다른 예시. 여름이 되고 아이들은 방이 덥다며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아이들이 거실마저 차지하니 나는 쉴 곳이 더 없어졌다. 보고 싶은 영화는 잔인하거나 선정적이라며 아내에게 제지당했다. 아내가 제지하지 않더라도 내가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면 특히 엄살이 심하고 겁이 많아 상상만으로도 실제의 통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둘째가 무엇을 틀 건지를 강박적으로 물어왔다. 아직 뭘 볼지도 정하지 않았던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검열당한다는 느낌으로 인해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나 3D 애니메이션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마저도 밤늦은 시간에는 불가능했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사단은 늘 아침에 터졌다. 아이들이 자고 일어나서는 이불 정리를 하지 않았고 나는 거실은 공동생활공간이니 일어났으면 이불 정리부터 하라고 재촉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서로 미적거리며 이건 네가 치워라 너는 왜 안 치우냐 하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꼭지가 돈 건 그 대화 아닌 대화로 아이들이 서로를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꽤나 거친 말로 아이들을 질책했고 기가 질린 아이들은 얼른 이불을 보따리 싸듯 짊어지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는 한동안 씩씩대는 나만 남아있었다.


비슷한 예시로 공동공간이 적절히 정리되지 않고 흔히 말하는 난장판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갈 때 짜증이나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학습지나 장난감 등이 거실 곳곳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 빨리 정리하라며 재촉했다. 아이들의 방에는 이사 오면서 새로 책상을 모두 마련해주었다. 나는 적어도 아이들의 방에 번듯한 책상을 놓아주며 어떤 기대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아이들이 그 공간을 의미 있게 사용해줄 것에 대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책상은 종종(내가 보기엔 꽤나 자주)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고 아이들은 책상을 치우는 대신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와 거실과 부엌, 때로는 안방에 자신의 물건들을 꾸러미 꾸러미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장면에서 치솟는 짜증이나 분노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이쯤에서 자기 분석


나는 새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정리나 공간에 대해 민감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가 나를 변화시켰는데 가장 큰 환경의 변화는 바로 '집'이었다. 관사를 전전하는 동안에는 어차피 변변한 집 한 채 없었고, 대부분 낡고 비좁은 오래된 아파트여서 그 공간에 대한 욕심도 기대도 없었다. 더군다나 출동 등으로 1년의 절반 이상은 집을 비웠고 나머지 절반도 해가 없는 시간에 출퇴근을 반복했기에 집에 있는 시간도 적었다. 당연하게도 아이들과 부딪힐 기회도 없었고 집 안에서 나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집은 달랐다. 좋은 동네에 비싼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이른바 '영끌'로 구입한 아내와 공동명의의 아파트였고 인테리어를 최근에 한 집이라 집도 깨끗하고 공간도 넓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뭐랄까, 이 집에 대한 소유권 혹은 사용에 대한 권리 등에 대해 민감해진 것 같았다.


두 번째로 큰 변화는 나의 상황이었다. 14년여의 직업군인 생활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고 나는 좀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당장은 돈이 되지 않고 언제부터 수익이라는 영역에 발을 담글지도 모른 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기분이었다. 남은 돈 중에서 당장의 생활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끌어모아 집을 샀기에 나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통장 잔고는 아이들 아이스크림도 고민해서 사줘야 할 만큼 형편없었고 이제는 그 잔고에 무언가가 더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큰 평수의 아파트를 골랐던 것은(33평이 큰 평수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홀로 집중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섞여있었는데 그 공간들은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내게는 작은 간이 책상 하나만이 남았다. 솔직히 짜증이 났다. 이런 피해의식들이 머릿속을 맴돌자 아이들이 그런 노력을 통해 애써 마련해준 그들의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나마 남은 공동의 공간마저도 어지럽히며 하나 남은 안방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 불쑥불쑥 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피해의식에 대하여


한 번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이제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이 공간을 엄격히 분리해서 사용하고 자신의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 유지하고 타인의 프라이빗한 공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나이가 되었을지. 결과는 NO 였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과도한 기대와 기준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과 결부되어 수시로 불이 붙는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는 분명 내가 가진 피해의식도 한몫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글이라는 건 잘 써질 때도 안 써질 때도 있다. 그건 내적인 소재의 고갈이나 컨디션의 문제이기도 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 없거나 시끄럽고 정신없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종종 아이들이 내가 그어둔 최소한의 선을 함부로 넘는다고 판단할 때 작업이 미진한 책임을 소란스러운 아이들에게로 돌리곤 했다. 내가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거나 이미 꽤나 오랜 시간 작업을 한 상태라 지쳤다는 것을 되돌아보는 것 대신 남 탓에 먼저 시동을 거는 것이다.


더불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지적하는 척하며 어른스럽지 못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정리에 미숙한 아이를 질책하는 것처럼. 혹은 힘들거나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될 때 불거지지 않았던 갈등이 갑자기 터지는 아이들의 미숙함을 호되게 비난하는 것처럼. 정당한 잘못을 정당하게 지적하는 모양새를 띠지만 과연 내가 피해의식으로 감정 주머니가 가득 차 있지 않았다면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때때로 같은 반응을 보였더라도 빈도나 횟수는 줄어들지 않았을까?


피해의식은 상기한 것처럼 남 탓을 부추긴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예로 들었지만 이런 상황은 매우 흔하다. 직장 관계나 교우관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내가 무언가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은 속 좁은 반응을 촉진한다.


남 탓은 매우 사소하고 미묘한 상황, 혹은 반드시 상대의 책임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또한 피해의식은 꽤나 치사한 방식으로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며 상대방을 비난할 구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문제는 극복이 어렵다. 스스로 내면의 문제를 완벽히 정리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런 나의 사정이나 노력에 발맞춰 행동하거나 변화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다. 이런 갈등은 만성질환 관리하듯이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정도를 조절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뿌리 뽑으려다가는 관계가 뽑혀 나가거나 누군가의 멘털이 바스러질 수도 있다. 다만 피해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마음에서 작용하는지에 대해 분석해본다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몇 가지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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