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자그마한 낚싯배. 노쇠한 몸뚱이. 노인을 바다로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낚시에 성공하려면 바다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은 지루하고 절망적이며 괴롭다. 과거의 영화도 한순간일 뿐. 몸과 더불어 마음도 나이 들어 갈수록 기다림은 익숙하지만 고되다. 기다림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짐작할 수 없는 미래의 희망 한 조각이 기다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 고민되고 겁나지만 포기해서는 안된다. 포기하면 작은 미래조차 한 줌 모래로 사라질 테니까.
낡은 낚싯배 하나로 어떤 의미 있는 일이 가능할까? 노인의 사투는 낚시라기보다는 사냥에 가까웠다. 고작 미끼와 낚싯줄. 84번째로 찾은 바다에서 비로소 만난 대어를 손에 넣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살짝 우습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미끼를 문 대어는 노인에게 붙잡히기는커녕 사흘 밤낮을 끌고 다닌다. 대어의 거침없는 항해는 노인을 조롱하고 시험한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내 힘이 빠져 밧줄을 놓아버리고 말겠지?
노인은 포기를 몰랐다. 포기를 모르는 노인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다.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대어와 기싸움을 하듯 대화한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린 탓에 노인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는 바다의 선물이고 노인에게 남은 시간은 짧다. 누가 먼저 포기하는가의 싸움. 낚싯바늘에 걸린 생명의 무게만큼이나 두 생명체의 사투는 눈물겹다.
대어는 힘을 잃고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지만 너무나 큰 탓에 작은 낚싯배 위에 실을 수 조차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제 몸보다 더 큰 물고기를 옆면에 매어단 채로 작은 낚싯배는 귀항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귀한 것일수록 노리는 이가 많아서일까? 대어의 피는 바다로 스미고 혈향에 이끌린 상어들이 달려든다. 노인은 상어로부터 대어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노자루마저 부러뜨려 상어의 두개골에 꽂아 넣은 뒤로는 수십 년을 닳고 닳은 노인으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바람을 타고 달린다. 상어들이 앙상한 뼈대만 남은 대어의 마지막 살점을 뜯어가든 말든 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바다의 선물은 거대했지만 쓰라렸다. 이때만큼은 말 많던 노인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의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실망, 분노, 허탈? 무엇이건 간에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픔도 자기 몫은 존재하니까.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바닷가. 노인은 배를 묶는다. 걷는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골격만으로도 능히 지금껏 보지 못했던 대어임을 알아차린다. 결국 노인에게 남은 것은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가끔 그런 때가 있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할 때가. 노인은 대어에게 이끌려가던 첫날밤, 결국 이 대어와의 사투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다로 나간 어부가 다 잡은 고기를 포기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오기는 희망의 땔감이 되고 성공의 작은 촛불로 어둠을 밝힌다. 비록 촛불은 언제고 꺼지지만 사람은 그렇게 생의 의미를 얻는다.
바다도, 자연도 인간에게 호의적인 존재는 아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을 놓아서는 안되고 희망의 결과가 실망이더라도 작은 온기는 심장에 남는다. 사투의 결과가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노인에게 대어란 어떤 '증명'이 되어준다. 노인에게 바다란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다. 노인의 사투는 내게 결과를 예측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다소 거친 어투로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