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중

박완서 '노란 집'

by 작가 전우형

주린 배 야금야금 채우는 중. 저녁의 조용한 시간이 참 좋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자연스레 빠져들 수 있는 책 한 권도, 그 책과의 소풍길로부터 강제 이별당하지 않아도 될 잠깐의 고요도.


p.183

아무리 하찮은 것들도 생명 있는 것들은 타고난 사명대로 살다가 죽고 자기 죽음을 통해 거듭난다.


p.191

나무들의 마지막 허영인 단풍의 시간은 꽃의 영광만큼 짧았다.


p.193

그 맛은 내 궁핍한 시대의 기억인 동시에 궁핍할 때도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기억이기도 하다.


p.197

이름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p.199

우리는 천성적으로 겨울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고 봄은 조바심한다고 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p.206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그렇듯이 규격에 맞게 가난한 게 아니다. 틀에 끼우거나 자로 잴 수 없이 유동적이고,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방어적인 가난도 있다. 우리는 너무 올려다보고만 살았지 내려다보고 살 줄 몰랐다.


p.212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215

전쟁 중에 결혼해서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난 여편네가 언제 심심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나는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p.217

요즘 애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더러 들리는데, 심심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학교 성적과 무관한 책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아이들은 심심할 시간은커녕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돌아가는 팽이와 다름없다. 자의로 도는 팽이는 없다. 자식이 행여 한눈이라도 팔세라 온종일 미친 듯이 채찍질 해대면서 책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p.229

연년생의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남으로 북으로 쫓겨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피난길엔 걷지 못하는 어린것 하고 임산부처럼 큰 재앙 덩어리는 없다는 거였다.


p.240

일생일대의 진실이랄까, 정신의 비의(秘義)는 아무리 본인이라 해도 그렇게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p.252

친정식구들 중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어느 틈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모르고 당한 일이고 안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순간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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