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과 자존심을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키워드는 '느낌'과 '욕구'다. 자존감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존중은 이미 목표가 달성된 상태다. 자존심은 자신을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혹은 존중받고 싶은 '욕구'다. 그리고 아직까지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한 상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인정에 목매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기에 조급함이 덜하다. 반면에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존심을 세울 수밖에 없다. 여전히 자신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타인의 인정과 존경, 좋은 평가, 칭찬 등을 필요로 한다.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현이 적합한 상태가 된다. 이 표현에는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우 큰 실망에 빠지거나 날카로운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부정적인 평가나 어조, 말투 등에 민감하며 도움이 될만한 피드백이나 사소한 비판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 인한 내적 반발은 기존의 불안이 클수록 격정적이다.
2. 실수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는 실수에 대한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실수에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특히 실수를 인정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실수를 인정하는데 장벽이 낮은 이유는 실수 하나로 자신에 대한 존중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또한 실수 하나로 모두가 나를 싫어할 거라는 왜곡되고 증폭된 불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덮으려 하거나 실수의 원인을 자신 이외의 요소로부터 찾으려 애쓴다. 예컨대 어떤 일이 어그러지는 데는 잘못된 계획, 선택과 판단의 오류, 프로세스의 부조화, 적절히 연계되지 못한 업무처리, 업무 미숙, 예상 밖의 상황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자존심은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자신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쪽으로 원인을 집중시킨다. 자신은 이번 실패에 있어 어떤 실수도 없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타인의 실수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다. 누군가가 귀책사유가 자신에게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내는 말을 꺼내면 오히려 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고 비난해 입을 닫게 만든다.
자존심이 이토록 자기 보호에 힘쓰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타인이 자신의 실수를 늘 지켜보며 비난에 시동을 건다고 여긴다. 인생은 가시밭길이다. 무언가를 잘 해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자신의 삶에 여유가 없다. 실수나 실패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며 그것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실수는 과감하게 지적하고 자신의 실수는 최대한 숨긴다. 간혹 자신의 별것 아닌 실수를 당당히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대범하고 자존감 충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다.
3. 존중
'존중'이라는 키워드는 자존감과 자존심에 동시에 등장하지만 용도가 정반대다. 자존감에서의 존중은 누군가에게서 억지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충분히 존중받는 존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일정 시간 동안 인간은 누군가의 보호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무능하다고 해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그 시기에 어떤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는가에 의해 굳어진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던 사람은 이런 아이디어와 무관하다. 하지만 늘 자신의 존재와 효용을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 섰던 사람은 존중받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것이 자존심에서의 존중의 원리다. 자존심에서의 존중은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존중에는 기준이 존재한다. 존중받으려면 기준을 충족해야만 한다.
자존심에서의 존중은 그래서 실수를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에게 존중은 종종 '유능함'과 연결된다. 유능함의 이미지는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평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존중에 대한 개인적 기준마저 사회적 기준으로 치환한다. 노력에 불을 지피는 한편 행복의 불씨를 꺼트린다. 삶의 여유가 사라지고 성공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세상을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눈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무시되고 쓸모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고, 그러한 구분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아이디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스러트린다. '정당한' 경쟁이라는 프레임에 빠져들기도 한다.
4. 기준
자격이라는 아이디어는 사회에 꽤 보편화되었다. 어떤 일을 하려면 정해진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자격은 개인적,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 객관화되고 정량화된 기준을 통해 주어진다. 예컨대 지정된 전공이나 학위를 보유해야 하고, 지정된 기관에서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인정되어야 하며, 공인된 평가기관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취득해야 한다는 식이다. 거의 모든 요소에 기준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기준의 필요성이나 보편타당성에 의문을 품기는 쉽지 않다.
4-1. 기준의 본질
이 같은 의문은 기준이 가진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 꺼낼 수 있다. 기준의 본질은 무언가를 구분하는 데 있다. 기준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는 'Pass/Fail'이다. 기준을 통과하면 Pass, 통과하지 못하면 Fail로 구분된다. 자격증이나 각종 인허가, 혹은 대출상담 등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다음 작동원리는 '등급'이다. 등급별 기준을 바탕으로 각각의 칸에 나누어 담는다. 등급은 너무나 일상화되고 보편화되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매년 수험생을 울고 웃게 하는 수능 등급, 내신 등급, 직장의 인사고과, 각종 가전제품에 붙은 에너지 소비효율등급, 우유의 등급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표준'이다. 대부분의 연구나 통계 등에 기본적으로 등장한다. 어떤 변수나 요소를 기준으로 예컨대 연간 소득 상위 10%, 하위 10% 등을 선별해낸다. '중산층의 기준'과 같이 웃지 못할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4-2. 기준의 순기능
기준의 순기능은 사회 혼란 예방이다. 그런 목적으로 민주주의 절차와 사회적 합의 등을 거쳐 만들어진 수많은 기준들은 '법'으로 모인다. 한정된 재화의 배분에 있어 기준은 더욱 중요하다. 예컨대 명문대 진학이나 대기업 입사 등이 그렇다. 한정된 '좋은' 위치 혹은 사회적 배경에 의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그런 재화들은 기준을 통해 서열과 등급을 나누지 않고는 누가 그것을 가지기에 합당한 지 구분해내기 어렵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가격 기준에 의해 취득 가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눈다. 즉 비싼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가격 기준에 충족하고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되는 시장경제의 방식이다.
누구나 인정할만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기준은 사회상규나 예의범절, 도덕 등으로 이름 붙여진다. 이 기준에 부합된 사람은 칭찬과 인정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눈총이 쏟아진다. 가시화된 강제성은 없지만 따르지 않기엔 부담이 따르고 심각할 경우에는 사회로부터 적잖이 유리되기도 한다.
사안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지고, 그래서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행하기 어려운 기준의 경우 법으로 정해진다. 법은 지켰을 때의 메리트와 지키지 않았을 때의 디메리트로 나뉜다. 법을 지켰을 때의 메리트는 그것이 법을 통해 보호받는 것이다. 예컨대 교통신호를 지킨 사람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은 사람에 비해 책임을 면제받는다.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어떤 재화를 취득한 사람은 타인에게 그것을 함부로 빼앗기지 않도록 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디메리트는 법을 지켰을 때의 메리트에 비해 조금 더 직설적이다. 사안에 따라 달라진다. 돈을 비롯한 시장 재화의 압류가 일어나기도 하며 벌점이나 징계 등을 통해 어떤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신체와 자유를 구속당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제할 방법 또한 법으로 정해진 바에 따른다.
4-3. 기준의 역기능
기준의 역기능은 이러한 구분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기준이 보편화되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기준이 없는 영역은 불신하게 된다. 구분에 익숙해진 탓에 기준을 세울 수 없는 영역도 기준을 만들고 세상을 옳고 그름의 흑백논리로 나눈다. 다양성 역시 옳고 그름의 기준 안에 보다 좋은 특성과 그렇지 못한 특성으로 나뉜다. 예컨대 밝고 활달한 성격은 좋고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성격은 나쁘다 라는 식이다. 옛것은 고루하고 배울 것이 없다는 식이며 요즘 사람들은 자기만 알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식이다. 이 같은 판단은 상황에 따라 의미를 갖기도 하고 왜곡과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구분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이미 여러 파편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사성을 띤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일부에 대한 판단이 구분된 집단 자체에 대한 인상으로 일반화되기 쉽다.
기준에 따라 무언가를 구분하는데 익숙해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와 타인을 존재 자체로 존중할 수 없게 된다. 존중에도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빠진다. 사랑받을 '자격'이 구성된다. 행동으로서의 실수나 실패가 '잘못된 사람'의 근거로 작용하고, 때로는 그 사람의 어떤 결여나 부정적인 특성에 가소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구분 짓는 것이 당연하고 어떤 지점에서는 무의식적인 구분이 이루어진다. 서로의 시선이 인정과 수용이 아니라 판단에 머물러있다고 생각될 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세상의 밑그림이 기준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자존감을 그릴 자리가 없다. 자존감은 '이미'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존중받는다는 느낌 또한 어떤 기준과 근거를 통해 증명되었을 때만 비로소 확신할 수 있다. 존중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자격시험을 통과해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존심의 날을 세워야만 한다.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가 충족되기 위한 전 단계로, 우선 스스로 존중받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확신과 입증이 필요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완벽한 존재라면 자존심을 촉발하는 내적 프로세스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런 상태라면 자존심에 불이 붙을 일도 없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결점도 많고 여전히 성장할 구석이 많은 존재다. 현재의 상태로서 누군가에게 존중받기 합당한 사람이기는 어렵다. 특히 고도화되고 첨예화된 사회 속에서 과도하게 높아진 기준에 빗대어보면 그것을 충족하는 것은 딴 세상 이야기다. 차선책으로 자존심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극히 일면만을 드러낸다. 가면의 일부가 벗겨졌다는 판단이 들면 지극히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자연스레 관계의 피로감은 커진다.
타인에 대한 기준은 자신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장벽이다. 존중에 대한 기준은 자신과 타인을 가리지 않고 작용한다. 기준의 결과가 타인에게는 비난이 되지만 자신에게는 '부정'의 이름으로 돌아올 뿐이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어떤 면을 부정하기는 굉장히 어렵고 에너지 소비도 크다. 절대 들켜선 안될 비밀을 가졌을 때처럼 마음이 무겁고 안절부절못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자존감을 낮추고 자존심은 높이는 원인이 된다.
기준은 필요악이며 적을수록 이롭다. 기준은 존재를 판단할 역량이 없는데 비해 마치 그 모든 것을 합당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인 양 행동한다. 당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구분을 정당화할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마스크를 쓴 채로는 호흡이 불편하다.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종종 작은 실수에 민감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타인이 나를 공격적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 때, 관계의 현기증이 느껴진다면 자신의 기준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된다. 내면화된 기준은 그 사람의 세상을 구분하고 관계 사이의 간격을 넓힌다.
"사랑과 존중에 '합당한' 자격은 없다."는 아이디어를 의식적으로 되새겨보는 것도 좋다. 완벽한 것은 없다. 완벽해 '보이는' 것만 있을 뿐. 인간은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명제에 '입증'은 필요하지 않다.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면 기준의 그림자를 걷어내면 좋겠다. 기준과 강력하게 맞물려있던 자존심이 함께 걷어질 것이다. 세상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내가 가진 관계의 창이 얼마나 열려있는지가 삶의 온도를 결정할 뿐. 안개를 걷어내는 것은 결국 햇살이다.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고 세상을 본다면 불안의 안개가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