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남은 시간

이별의 이유를 찾다가

by 작가 전우형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실존하던 세상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잔상 하나가 아른거린다. 호수에 비친 달처럼 아름답고 선명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본다. 손에 닿는 건 연기처럼 흩어지는 호수뿐. 선명하던 모습은 잔뜩 흐려져 이제는 알아볼 수 없다. 시간은 고통에 비례해서 힘든 순간은 유난히 종횡으로 기다란 선을 남기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리다. 기억이 삶의 모든 지점에 고르게 자리 잡으면 좋으련만 두 손을 모아봐도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심장은 차갑다.


사선으로 뻗은 햇살의 그림자가 하루의 남은 수명을 가르쳐주었다. 당연한 것처럼 지고 뜨는 해를 바라보면 우리의 만남도 그럴 거라고 믿고싶어진다. 사소한 이별도 삶의 카테고리에서 밀어내고 싶은 것은 우리의 재회에 '반드시'가 전치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하늘이 오늘의 하늘일 수 없듯,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우리일 수 없었다. 미래는 단정 지을 수 없고, 또 단정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늘의 별과 같던 불안을 잠자리채로 낚아채 품에 안았던 것은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그의 눈빛은 언제나 나를 비추었지만 나는 다른 곳을 바라보기 바빴고, 그가 늘 곁에 있을 때에도 기대지 못한 채 외줄타기같은 하루 위에서 휘청이고 있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은 그렇게, 햇살 닿은 아스팔트의 습기처럼 사그라들었다.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한의 꿈 속이라면 그와 바다를 바라보던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 수 있기에. 아침과 저녁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스스로의 변화를 투영하며 그들도 나처럼 슬퍼한다고. 웃음이 저물어간다고. 우리의 이별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같을 거라고. 우리, 그 바다에 가까이 가지 말자고. 잔잔한 곳에 이대로 머물자고. 우리, 이별로 다가가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바다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 같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멀리서도 반짝거리는 바다가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문 채로 상상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가간 바다에서 나는 결국 그를 잃어버렸다. 송두리째.


눈뜬 아침, 그가 사라진 공간을 가득 채운 그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발길 닿는 곳마다 그의 흔적이 느껴지고 때때로 그의 모습이 무지개처럼 선명히 흐려진다. 그는 '위험'이라는 단어에 붙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만용이라 치부했지만 그에게 그것은 신념이었다. 어쩌면 늘 죽음에 근접해있었던 그에게 위험하다는 말은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주저앉히는 족쇄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늘 죽음과 싸웠고 위험에 대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에 저항했다.


반쪽의 호흡만으로도 세상을 온전히 품었던 사람, 그는 내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면 호흡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얼마나 가졌는지보다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 눈빛과 헤프지 않은 웃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한 문장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다. 그는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도 늘 내 앞에 섰다. 그는 한 줌의 빛으로도 나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미웠다. 그를 존경했고 또 그를 시기했다.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 고귀한 사람을 아꼈지만 한편으로는 늘 열등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나는 이 멋진 남자를 끝내 완전히 사랑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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