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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는 걱정에 빠져드는 이유

걱정이라는 안개 속에는 불안이 숨어있다.

by 작가 전우형

감정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이성이 자리할 곳이 없다. 두려움과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겪는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싹한 느낌이 들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거나 불을 켜서 확인해보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이성과 논리의 작용이라기보다는 꺼림칙한 느낌을 해소하고자 하는 본능에 의한 행동이다. 때로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우리는 생각이 정지된다. 폭발하는 에너지의 통로가 되어 공격성을 여과 없이 뿜어내고 나면 정신을 차렸을 때 후회할 일만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은 무서우면 울음을 터트리거나 도망을 간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아이들이기에 그런 모습도 귀엽고 용서가 된다. 물론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감정표현에 솔직한 것은 아니다. 가정환경이나 성장환경, 자라나면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아이는 일찍 어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은 감정을 숨기는 법부터 배운다.


어른이 되면 주변인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감정적이라 함은 스스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바뀐다. 감정은 표현해서는 안될 몹쓸 것으로 변질되어간다.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부러 너털웃음을 짓거나 담담함을 가장하며 두려움의 현실성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감정의 영향력은 어른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른은 감정에 대한 반응을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하는 스킬을 익혔을 뿐이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연습 등을 통해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누그러트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하다. 물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몸에 힘이 들어가면 더 빨리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힘을 빼지 못하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이성이 마비되고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감정은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로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감정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감정의 발생 자체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해소방안을 통해 감정을 슬기롭게 다스리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지’함으로써 서서히 감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정의 홍수로 힘들 때 생각이 마비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은 때때로 생각의 ‘폭발’을 유발하기도 한다. 급격한 공포나 두려움은 생각을 마비시키지만, 점진적으로 지속되는 불안과 같은 감정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가라앉지 않는 불안으로 힘들 때 구름처럼 일어나는 생각을 우리는 ‘걱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정상적인 이성의 작용이 아니다. 합리성이나 논리성, 현실성 등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망상적 사고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불안에 대해 끊임없이 곱씹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골몰하는 것 역시 망상적 사고의 일종이다. 불안감을 억눌러보기 위해 여러 가지 걱정을 해보지만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걱정들은 대부분 ‘~하면 어떡하지?’에서 끝이 난다.


“비가 오면 어떡하지? 늦게 도착하면 어떡하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면 어떡하지? 길이 막히면 어떡하지?”


비가 올 것 같으면,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강수확률이 높으면 우산을 챙겨가면 된다. 늦게 도착할 것이 걱정되면 약속 장소에까지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예상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출발하면 된다. 나를 싫어하면 그뿐이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상대방의 호불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생각해보면 답은 나오지만, 여기까지 생각은 미치지 않는다. 아니, 이미 그 사람은 해결책을 알고 있다.


이런 걱정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알려주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러한 걱정은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걱정에 몰두함으로써 현재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걱정이 해결되어버리면 더 이상 거기에 몰두할 수 없기에 걱정은 계속해서 불어날 뿐 줄어들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안하고, 자신이 빠트린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렇게 꼬리를 무는 걱정을 하느라 정작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상상했던 걱정스러운 상황은 현실로 나타나고 만다.


애초에 해결해야 할 문제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당장의 힘들고 짜증 나는 상황을 잊어보기 위해 다른 생각에 잠겨보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이나 다름없다. 잠깐은 괜찮지만 잠시 후 더 심한 갈증이 찾아온다.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민족을 끌어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안을 누르기 위해 또 다른 불안을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대 로마는 바로 이런 식으로 게르만족에게 멸망했다.



이와 같은 강박적이고 망상적인 걱정들을 그 자체를 문제시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본인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모른다는 점이다. 내면의 불안이라는 원인을 직시하지 못한 채 걱정이 많다는 결과적 현상만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더 안타까운 점은 주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비판을 늘어놓기 쉽다는 점이다.


“내가 다 알려줬잖아! 이렇게 해보라니까. 왜 해보지도 않고 맨날 걱정만 하니?” “지긋지긋하다. 이제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너는 왜 이렇게 부정적이니?” “생각을 좀 바꿔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긍정적으로!”


하지만 이런 말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만하고 싶은데 그만둬지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식의 비판은 자책을 키울 뿐이다. 이성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데 자꾸만 무고한 의지가 비난받는다. 이때부터 악순환이 시작된다.




걱정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닌 나는 그런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긴다. 그런 나에게 주변인들이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하라고 말한다. 점점 더 걱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없게 되고 자책이 심해진다. 외로워지고 고독해진다. 이러다 사람들로부터 더 버림받게 될까 걱정이 더해진다. 이런 자신이 싫다. 자신의 생각조차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자신이 또다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게 된다. 그냥 지나칠 별것 아닌 걱정거리도 심각하게 여겨지고 역시 나는 극복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자기 판단의 근거가 된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때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생각의 본질에 대해 차분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강박적으로 떠오르거나 무의식적으로 집중하게 되는 생각들은 알고 보면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이 아닐 때가 많다. 힘든 순간을 버티기 위해, 불안감을 누르거나 느끼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빠져드는 생각이나 걱정, 상상 같은 것들은 인간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려 하는 것만큼 소모적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생각, 걱정, 상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으로 밀어 넣는 ‘감정’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비현실적이고 망상에 가까운 생각에 골몰하도록 만드는 뿌리에는 반드시 원인이 되는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을 인식하고 해소시켜주면 이어지던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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