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때 나는 죽음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내뱉는 말속에 그런 나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나는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지며 사느니 죽는 그날까지 즐겁게 살다 가고 싶다 말하곤 했다. '아파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느니 빨리 죽는 게 낫다. 나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가까운 분들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특히 그런 생각은 강화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저렇게 연명하지 않으리라. 투병 중인 환자나, 돌보는 가족이나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멀쩡한 사람도 저렇게 살면 아파질 것 같았다.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곳에 가면 알고 싶지 않은 나의 운명을 알게 될 것 같았다. 이대로 평범하게 살다 가리라. 죽어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죽는 순간만큼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 싫다.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내 몸에 손대는 것이 싫다. 타인에 의해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것은 질색이다.
병원은 죽음에 가까울까, 삶에 가까울까? 병원에는 항상 장례식장이 같이 있는 것을 보면 죽음에 더 가까운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알맹이가 없다. 죽기 위해 병원에 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다들 살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어 장례식장으로 가고 누군가는 살아 병원문을 나선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중환자실은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 역시 그런 죽음의 향기를 느낀다. 가지 말라 울부짖으면서도 그 사람이 곧 갈 것임을 운명적으로 직감한다. 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죽음에 가장 가까운 역설적인 곳. 그곳이 바로 병원이다.
죽음은 과연 인생의 마지막일까? 이러한 의문은 수천 년에 걸쳐 되풀이되어 왔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며, 그 세상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성실하게 연구해온 집단이 아마도 '종교'일 것이다. 종교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현세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는 학문이며 가치 추구이며 철학이다. 분명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인생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어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존재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며,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이 아는 것이 진리이며 내가 아는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게 해 준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세상에도 존재하고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는 ‘감정’이 그런 존재였다. 내 일부면서도 내가 아닌 것.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 내 안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중적이고 부족하고 토라지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며 팔을 뻗을 수 있었다. '모든 게 내 탓만은 아니었구나.' 그런 위안이 죽어가던 나를 살렸다.
죽음은 삶을 새롭게 보게 해 준다.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삶의 소중함은 깊어진다. 하루를 뜻깊고 기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 죽다 살아난 사람은 정말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살았다. 죽음을 옆에 두고 언제든 꺼내어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비수처럼 지니고 다녔다. 삶이 지옥인 사람에게 죽음은 선물일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나에게 죽음을 선물하리라.' 그런 다짐을 곱게 써서 말아 쥐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다시 삶에 대해 논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것은 죽음이 내게 선물해준 새로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