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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그 역시 별다를 것 없음을, 가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by 작가 전우형

살다 보면 '그때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 섞인 후회감을 느낄 때가 많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다. 내가 번아웃과 우울증을 겪게 된 이면을 탐구해보면서 이처럼 과거를 곱씹는 생각이 계속되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관학교 입교를 결정한 이후 나의 삶은 뒤돌아볼 틈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이상 미래는 90% 정도 정해져 있었다. 취업고민에 시름하는 사회의 친구들과,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취준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취업 걱정이 없는 직업군인의 길은 달리 고민할 여지가 없는 최고의 길인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 길이 나에게 적합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졌다.


임관 후에는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껴야 했다. 밤 12시에 퇴근해 새벽 5시에 출근하는 생활을 버티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임관 이듬해에는 결혼을 했고 2~3년 간격으로 아이도 3명이나 생겼다. 당시의 나는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가정이 있고, 애가 줄줄인데 이제 와서 직장을 바꾸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 생각했다. 방황은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직업군인이라는 직장이 나에게 맞는 직업인가에 대한 고민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긴 무의식에 삼켜진 기간 동안 삶에 대한 간절한 의문은 이처럼 무시되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강화되어갔고 그 환상은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없도록 나를 끊임없는 의혹에 빠트렸다. 힘든 순간을 맞이할 때면 그런 의심은 더 고개를 들었다. “그때 생각 없이, 고민 없이 길을 잘못 선택했기에 지금 내가 이토록 힘들게 사는 것인가?”




몇 년 전쯤, 창원에서 부산으로 출퇴근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가락 IC부터 서부산 TG까지 연일 정체가 계속되었고 이어지는 동서고가로에서 황령산터널까지도 정체는 풀리지 않았다. 가끔은 창원터널에서부터 정체가 시작될 때도 있었다. 도로 위의 주차장 같은 그곳에 서 있노라면 피곤에 지치기도 하고 이 정체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길로 빠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정체가 심해질수록 더 심한 짜증으로 나타났다. 다른 경로를 찾아보기로 하고 한 번은 진해에서 용원 방향으로 빠져보기도 했다. 강서구를 지나 하구둑을 넘어가는 경로를 타보기도 했다. 강변도로를 따라 올라가 감전램프로 우회해서 진입해보기도 했다. 북부산 TG를 지나쳐 만덕터널로 가는 길을 타보기도 했다.


여러 경로를 시도해본 결과 결국 느낀 것은 어느 길이나 빠를 때도 있고 느릴 때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빠르고 편한 길은 없었다. 어떤 길은 신호 한 번을 통과하는데 삼십 분가량 걸릴 때도 있었다.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길도 있었고 갈림길에서 제대로 빠지지 못해 돌아 나오느라 몇십 분을 소진할 때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도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나의 반응은 달라졌다. 더딘 것처럼 느껴져도 남해고속도로와 동서고가로를 타고 가는 길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방황을 끝내고 나니 도로 정체를 그냥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다른 길도 별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고 나자, 큰 스트레스 없이 긴 출퇴근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방황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현재의 길에 집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이 내게 선물해 준 지혜로운 '선물'이었다.


도로 정체를 버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운전하기 전에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 일이 잘 없었다. 주위에는 라디오보다도 훨씬 더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화려한 색채의 영상물들을 두고 굳이 목소리만 나오는 라디오를 즐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운전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그 지루함을 덜어주는 데는 라디오 방송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귀로 듣는 것은 운전에 큰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멀티태스킹에 의한 병목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때는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하는 대부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꿰차고 있을 때도 있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마음의 면역에 누수를 일으킨다. 서서히 새어나가는 면역력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삶에 대한 확신을 흩어놓는다. 마음의 면역이 무너져 내리면 그것이 우울증이 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피폐해지면 번 아웃이 온다. 치유하지 않았던, 돌봐주지 않았던 내가 뒤늦게 성질을 부린다. 약해진 나는 갓난아이 같은 어리광을 받아줄 여력이 없고 내면은 갈라지고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분열되고 무력해진 나를 느끼고 통제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책을 키운다. 완벽함을 포장하지 못하는 나는 더 이상 세상에 필요 없다고 여겨진다.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나를 밀어낼 것만 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생각의 끝은 언제나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로 향한다.


이번 생은 이미 끝났다고 스스로 판결 내린다. 누구도 주문하지 않았을 사형선고를 스스로에게 내린다. 지금의 불행이 영원할 거라 단정 짓는다. "앞으로 내 인생에 단비는 내리지 않을 거야. 삶은 무의미해." 무언가를 해보기 이전에 포기하게 되고, 새로운 시도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삶에 재미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스스로가 만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생각을 달리 해보아야 한다. 미련이 남아있다면, 그 미련을 떨쳐버릴 샛길에 빠져보아야 한다. 방황은 그만의 의미가 있다. 그것을 '쓸데없이 돌아가는 것,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는 과정으로써 방황은 재평가받아야 한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환상에 빠져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으려면, 방황은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할 중요한 경험이다. 그 길 역시 별다를 것이 없음을, 가보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역량과 가능성을 스스로 테스트해보고,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귀중한 재산이 있다. 이 보물들은 삶이 피폐해지고 급격히 흔들릴 때 우리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렇게 찾아낸 자신의 길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그 길이 오래갈 수 있는 길이며 재미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긴 방황 끝에 나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주어진 일을 하느라 바빴던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감정에 대한 탐구는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밝혀준다.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면에 눈을 뜨게 해 준다. 부족한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의 '방치'를 반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무너졌던 나를 일으키고 치유해주고 새로운 에너지를 선사해주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살아간다.


이제는 간혹 내비게이션이 알려주지 않은 길로 들어서 보곤 한다. 왠지 그쪽 길이 더 빠를 것처럼 여겨지면 망설이지 않고 한 번 들어서 본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려면 가보지 못한 길로 한 번 가보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길 끝에 굉장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들어서보면 별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이런 길이 있었을 줄이야 하고 '유레카!'를 외칠 때도 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쪽 길을 통해 가면 된다.


분명한 것은 해보기 전에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어떤 길이든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가고 있는 길보다 훨씬 더 빠르고 쾌적한 길이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그 길을 들어서 보면 그 길 나름의 속도방지턱들이 존재한다. 내가 놓친 것 같은 그 무언가가 있다면 늦었다 고민만 하다가 멈추기 이전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보면 된다.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미련이 남은 채 뒤를 돌아보며 더딘 걸음을 내딛는 것보다 직접 그 길로 한번 나서보는 것이 더 좋다. 만약 그 길에서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귀중한 소득이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가진 환상의 현실성을 판단하고 이제는 집중해서 가던 길로 정진하면 된다.





취직을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나의 이런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이라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삶을 청산하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것을 고대하는 이들에게, 혹은 원했던 직장과 결별한 채 힘든 삶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내 고민을 두고 이처럼 말할지도 모르겠다. "바깥에 나오면 뭐가 다를 것 같으냐. 지금 있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사실만을 느끼게 될는지도 모른다.


남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결국은 내가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깨달을 수 있는 결과적인 지혜들이다. 그렇기에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로 해소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우리의 발걸음에 제동을 걸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부추긴다. 모든 역량을 현재의 길에 집중해도 성공하기 힘든 경쟁사회에서, 발목에 커다란 쇠고랑을 차고 경쟁에 뛰어드는 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강화할 사건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더욱 고개를 쳐들 것이다. 그렇기에 미련은 반드시 털어내고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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