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비밀번호를 잃어버린 날

너의 별자리

by 작가 전우형

무슨 사정이 있겠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되뇌는 사이 오전이 송두리째 달아나버렸다. 어떤 생각도 건강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해하자. 노력해보자. 좋은 면만 보자. 좋은 면만. 하지만 몇 시간 만에 내부가 고갈된 느낌은 뭘까. 몇 가지 설레는 이야기들이 떠올랐었는데. 잠깐의 새벽 동안 구상하던 스토리가 있었는데. 모조리 사라지고 백지만 남았다. 글쓰기는 참 정직한 작업인가 보다. 비운만큼 노력한 만큼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다른 일로 에너지가 바닥을 치면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처럼 멈춰버린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느낌. 아니, 어쩌면 나만 멈춰버린 걸지도. 시간도, 노래도, 하늘도 모두 흘러만 가는데 오후의 햇살은 언제쯤 이곳을 비출까.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홀로 끄적이네.


그도 지치고 힘들었겠지. 정지된 시간을 걷고 있었겠지. 미워하지 말자. 애써 독약을 삼키지 말고 뱉어버리자. 저 멀리. 대신 사랑하자.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돕자. 때론 하고 싶었어도 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을 뿐.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처럼. 추운 겨울 우리만이라도, 인연의 실을 긁어모아 우연히 이곳으로 모여든 우리만이라도 서로에게 편하고 따뜻했으면. 솜이불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릎담요 정도는 되어줄 수 있잖아. 겨우 단잠에 빠져든 사람. 눈 붙일 수 있게. 조금 더 담담한 호흡 내쉴 수 있게. 지금은 잠시 그대로 두자.


감정의 품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을 때가 있다. 온몸이 젖으면서도 팔다리를 힘껏 저으며 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싶은 그런 순간이. 그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사람과 사랑과 그리움, 실망, 기쁨과 행복. 그 가운데서 눈물은 언제나 옆에 있었다. 끝을 찾아 헤맨다. 보이지 않는 끝을. 끝이 내 발가락 바로 앞 일지 모르면서도 끝은 저 멀리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는 내가 우습다. 여전히 그곳은 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도착할 거라고 막연히 추측하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 삶은 늘 코앞에 서성이는데 나는 늘 끝을 기다리면서도 그것이 멀리 있길 바란다.


오늘따라 마음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느낌이 든다. 두드려도 대답은 없고 삼키지 못한 흐느낌만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거울에도 창문에도 빗물이 흐른다. 비가 내리는 건 세상이 울기 때문이라고 했지. 소리를 줄여도 빗소리는 귀를 파고들고 등 돌린 그의 턱끝이 가볍게 떨림을 본다. 잔잔한 어깨의 진동을 바라보는 나의 눈동자도 흔들림에 젖고 희미한 그림자가 그의 발끝에서 떨어져 나와 내게로 걸어온다. 분리될 수 없는 분리가 알람처럼 잠들었던 마음을 깨운다. 풀어진 단추를 채우고 흩어진 눈물을 주워 담는다. 긴 호흡이 가슴을 한차례 맴돌았지만 나는 미처 내뱉지 못하고 삼키고 말았다. 그 안에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묻어있었을까 봐.


마침내 긴 꿈이 햇살에 밀려 달아나고 나는 물끄러미 창밖을 본다. 창문 틈으로 아직 서늘한 아침 공기가 불어 든다. 새벽은 오랜 그리움을 깨우고 파르스름한 여명은 여전히 차갑지만 해가 뜬다고 세상이 동전 뒤집듯 따뜻해지는 것은 아닐 터. 우리의 '친숙'에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여전한 거리감이 존재하더라도 서로의 눈길이 먼 곳에서나마 마주칠 수 있다면. 헤아릴 수 없는 우주 저편에 우리의 접점이 존재하더라도 나는 끝내 너의 별자리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리고 사소한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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