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9

'처음'이 가진 의미

by 작가 전우형

초인종 소리에 반응하듯 문이 열렸다. 얼굴이 눈에 익은 중년 여성이 우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반기던 눈빛이 의구심으로 변해갔다. 비켜선 틈으로 그가 먼저 내부로 들어섰고 그녀 앞에서 주춤하던 나는 어찌할지 모르다가 그의 손에 이끌려 '집'의 문턱을 넘어선다. 나를 거실 한쪽에 앉힌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중년 여성의 제스처에 그제야 반응한다. 대강의 상황을 최선의 언어로 설명하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탄의 빛이 스친다. 그녀는 수 차례 나를 흘끗거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바닥을 바라보는데도 의뭉스러운 시선 몇 개가 정수리에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눈치는 습관이었다. '부모도 없는 게 눈치까지 없으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나름의 싹싹함을 장착해야 했고 버려진 아이의 구구절절한 사정을 떠올리며 편견과 혐오에 사로잡히지 않을 해맑은 웃음으로 선천적 그늘을 덮어야 했다. 통과의례는 분명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철부지 아들이 동정심으로 데려온 골치 아픈 여자아이의 처우를 고민하는 엄마는 사사로운 것 하나부터 민감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버려진 아이들은 자신이 왜 버림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참혹한 현재를 버틸 힘도 모자라 기억에도 없는 과거를 곱씹을 틈이 없다.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는 법을 익힌다. 부모도 버린 아이에게 쏟아지는 편견 어린 시선을 자기화한다. 동정과 무시, 혐오가 뒤섞인 세상의 목소리가 구간반복으로 재생된다. 나쁜 아이는 사랑받지 못해.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착해야만 해. 어떤 아이라면 버려지기에 충분한지, 그 이전에 버려짐이라는 형벌이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가치판단도 해보지 못한 어린아이의 세상에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의 조건이 안착되고 만다. 도발적이거나 자기주장이 강할 것 같은 인상이나 눈빛을 보여서는 안 된다. 최대한 이곳에 어떠한 폐도 끼치지 않을 순한 양과 같은 모습으로 숨죽여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나를 함부로 대하더라도, 모욕적인 언사로 나를 무시하더라도 어떤 저항도 하면 안 된다.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몇 가지 메시지를 마음속으로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생존에 필요한 단서들을 모은다.

"하지만 후야.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아이를 집에 계속 데리고 있을 순 없어."

"그럼 일단 며칠만 머무는 건 허락할게. 하지만 오래는 안돼. 알겠니?"

협상은 성공적인 것 같다. 그녀가 다가온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쯤에 불안한 시선을 맞춘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다.

"겁내지 않아도 돼. 듣고 있었겠지만 널 당장 내보내진 않을 거야. 우선 씻자. 이대로 집을 돌아다닐 순 없으니까. 혼자 씻을 수 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샤워기를 들고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놀란다.

"휴. 이러고 있을 것 같았어. 들어오길 잘했네."

이내 능숙하게 머리를 감기는 그녀의 손길에 당황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낀다. 따뜻한 물과 따뜻한 손. 그리고 부드러운 비누거품. 누군가에겐 사소했을 것이나 나에게는 처음인 것들. 기억에도 없는 오래 전의 시점에 어쩌면 '엄마'와 나눴을 인간적인 마찰이 얼어붙어있던 소녀의 마음을 녹인다.


홍수 같은 흙탕물이 욕실 바닥을 뒤덮는 광경에 그녀는 얕은 감탄을 내뱉으면서도 의무감이나 도전의식의 발현인 듯 내 몸 곳곳을 거뭇거뭇한 비누거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박박 문지르고 물로 씻기기를 반복한다. 꽤나 고된 손길이 오간 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뿌듯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거울 앞에 세운다.

"어때? 너도 놀랍지?"

동그랗게 치켜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소녀는 뽀얀 얼굴이 스민 열기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치덕치덕 붙어있던 세상의 먼지가 씻겨나간 머리칼은 불투명한 비닐포장지를 벗긴 듯 선명한 검정이다.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다. 부끄럽지만 싫지 않았다.


"내 이름은 '선명'이라고 해. 편하게 '명이 이모'라고 부르렴. 아까 들었겠지만 이 아이 이름은 '후'라고 하고. 사실 조금 놀랐단다. 후가 누구를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리고 저토록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변호하는 모습도."

'이름을 소개해주는 건 손님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그녀의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가 담겼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처음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준 이 두 사람에게 그저 스치는 공기는 아니길 소망했다. 잠깐이라도 그들의 호흡에 머물며 폐포와 적혈구를 통해 세포 하나하나와 연결되기를 바랐다.

'처음'이라는 말에 설레었다. 타인에 무관심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존재. 그런 이의 관심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아무도 집어가지 않는 빈 도화지 같은 그림에 값을 치러줄 사람. '동정이라도 좋아. 날 이대로 두지 마. 제발 데려가 줘. 그런 마음의 두근거림이었다.' 그녀의 이어진 말은 그런 기대감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우리 잘 지내보기로 하자. 후가 널 상당히 아끼는 눈치니까."

파리하던 얼굴에 혈색이 도는 모습을 본 그녀는 나를 입구 쪽 방으로 안내했다.

"누추하지만 당장 내어줄 방이 마땅치 않네. 이곳을 정리해줄게. 오늘만 여기서 쉬렴. 잠들기 전까지는 후와 같이 있어도 돼."

그가 그녀의 뒤에서 작은 만세를 온몸으로 티 나지 않게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는 모습 처음이네. 이쁘다. 앞으로도 종종 웃어주렴."

나는 고개만 또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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