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희망의 가면을 쓴 채 나타난다.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공기가 모든 걸 알려주니까.' 후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파국을 피해 갈 수 있었을까. 암호 같은 문장의 진의를 알아차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평범한 이는 이해할 수 없다. 부모가 없는 느낌을 보통의 아이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처럼. 후는 분명 보통의 아이와는 달랐다. 호기심으로 결핍을 후벼 파지 않았고 이제 막 돋아난 진피층을 손톱으로 긁어 피를 내지도 않았다. 편안하게 나를 감쌌고 공포에 앞서 눈을 가렸다. 분명 10살 남자아이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8살 여자아이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안정감과 포근함이 좋을 뿐이었다. 그래서 단단하게 조여온 마음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삶도 '평범'의 스펙트럼 끝에 위치했지만 후의 세상은 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후가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건 노크도 생략한 채 머릿속을 헝클어트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후는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게 어떤 기분일 것 같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굴렸다.
"음... 좋지 않을까? 원하는 걸 해줄 수도 있고... 사랑받기도 쉬울 것 같은데?"
후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살짝 열리며 깊은숨이 한차례 오갔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지? 분명... 선물이겠지...?"
흐린 말끝처럼 확신이 허물어진 목소리였다. 어떤 질문은 바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 질문에 답은 필요 없다. 어쩌면 그는 명치끝에 머물던 석연치 않은 단어의 집합을 곱씹었을지도 모르지만.
후는 지난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들은 달콤한 웃음기를 머금고 독버섯 같은 말을 쏟아내. 자신의 이득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방해가 되면 저주를 퍼붓는 건 흔한 일이야. 매 순간 그들의 마음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 타인의 속내를 볼 수 없는 건 신의 선물이지만 그 축복은 나를 비켜갔어. 세상은 언제나 위선으로 가득 차 있어. 나를 짓누르던 악의의 틈을 비집고 울음소리가 들린 건 처음이었어. 온몸으로 비명을 외치던 너를 본 순간이었지. 소리는 바다를 벗어나지 못해. 넌 팔다리를 내저었지만 점점 더 두려움의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지. 네게 손을 뻗을지 한참을 고민했어. 사실 두려웠던 거야.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관계는 지독한 형벌이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산산이 무너트린 건 그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부모의 가시는 아이에게 사라질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놓고 아이에게 날카로운 가시를 들이대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테지만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린 후의 마음에는 미처 여과되지 못한 부모의 서툰 속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언어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의 마음에 혼란스러운 선을 그었다. 부모는 사랑한다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는 동시에 피로감에 절은 마음이었고 아이가 어서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아이에 대한 책무를 미루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대화 속에서 온갖 감정을 쏟아냈다. 후는 울었다. 두려워서 울었고 미안해서 울었다. 해석 불가능한 언어가 그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명이 이모가 그의 친모가 아님을 알게 된 건 그들과 함께한 지 2년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피를 나눈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탓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두 사람은 격이 없었고 친근했다. 그의 부모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을 때는 나만 집에 머물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도 않은 채 다짜고짜 후를 데려오라고 했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