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17

마지막 여행

by 작가 전우형

겨울의 수목원은 쓸쓸하고도 아름답다. 색 바랜 꽃과 나무가 마치 하얀 얼음결정을 뒤집어쓴 것처럼 반짝이고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때마침 푸른 겨울 하늘 아래로 바람이 잦아들고 잠깐의 따뜻한 기운이 구멍 뚫린 마음을 채운다. 세상의 모든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멀지 않은 해변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들리고 많지 않은 행인의 조곤조곤한 대화가 겨울 공기를 어루만진다. 사람의 흔적은 어느 곳이나 있다. 하지만 이곳에 후는 없다. 시들고 낙하한 꽃과 잎사귀가 모든 봄의 끝이 아니듯 끊어진 인연도 반드시 재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계절의 순환처럼 당연히,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시골길은 한적하지만 차분하지는 못하고 종종 덜컹거린다. 속도를 늦추는 시점이 조금만 늦어도 도로 곳곳의 속도방지턱에 크게 요동치며 가끔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펄쩍 뛰어오른다. '마을 주민 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제한속도 30km/h로 감속하자 마치 자동차가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움직이고 있음을 알지만 감각은 멈춰버린 시간을 맴돈다. 나의 삶이 요철을 만났을 때도 덜컹거리고 어수선했으며 좀처럼 정체된 느낌이었다. 비록 느리나 계속해서 발걸음을 떼고 붙이면서도 제자리걸음 같고 어쩐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후를 만나고 난 후의 내 삶은 새로 출발한 여행과 같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불어온 바람이 있었다. 지나친 거리가 있었으며 들려온 노래가 있었다. 내 삶은 때론 허수아비처럼 날아드는 새를 바라만 보는 입장이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후는 그 새들이 내가 두려워 날개 핀 하늘에서 내려오지 못함을 알려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순간도 하나같이 의미가 있음을 후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마치 지금의 여행처럼 후는 내 곁에서 세상을 보여주었다.

후가 그랬던 것처럼, 뒤돌아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빠르면 빠른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복잡하고 한적한 순간들 속에는 각자의 호흡이 있었다. 덜컹거리는 길 위에 삶이 있었고 얼어붙은 꽃 위로 봄이 있었다. 계절의 거친 하루가 나의 하루가 되었고 잊었던 온기가 후와 맞잡은 손 끝에서 나를 감싸며 사람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바람의 질감과 재잘대는 새들의 지저귐이 어딘가를 향하는 마음과 기다리는 시간과 연결되어 멈춰있던 심장을 뛰게 해 주었다. 조급하고 답답했던 목적지로 향하는 시간이 후와 함께할 때 숨이 트였고, 목적지를 잊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 순간들 속에서 나와 고민이 사라졌고 공백을 채운 숨소리와 바다의 속삭임이 우리를 마주 보게 했다.


나는 다시 걷는다. 해와 나무와 길과 바다를 본다. 내려가고 올라가며 가끔 뾰족한 바위 끝을 걸으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다. 쓰러지지 않을 만큼. 그래, 쓰러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옆에서 손 잡아줄 후가 없더라도 나는 안간힘을 쓰며 걷고 보고 듣는다. 갖고 있던 모든 사념을 소금처럼 바다에 녹이며 마음을 짓누르던 질량 덩어리를 내려놓고 걸음을 가볍게 한다. 걸음마다 잊은 줄 알았던 세상의 디테일을 본다. 손톱만 한 소라게의 눈과 집게발을 보고 조개 뒤에 숨어 웅크리다 그 작은 집게발을 세우며 자신보다 200배는 거대할 사람에게 대항하는 작은 바다생물의 용기를 본다. 시냇물처럼 흐르는 바다의 계곡을 보고 물이 빠진 뒤에도 작은 연못처럼 고인 바다의 호수를 본다. 오늘의 태양이 머리 위에 늘 있었음에도 그 희망은 내 것이 아닌 줄 알았지. 청량한 해풍을 한껏 들이마시며 폐포 하나하나를 깨끗이 세척한다. 오랜 마음의 찌꺼기들이 샅샅이 씻겨 내려가도록.

모진 나날이라면 모질었을 예전의 하루하루가 조금 덜 아프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상처에 앉은 딱지들은 자꾸만 벌어졌고 그 사이로 피가 흘렀다. 상처가 나을 동안 달빛을 바라보았다. 공백을 메울 찬연한 잉크빛의 아름다움을 달빛의 그림자에 담았다.


바다가 해를 삼키려 한다.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 거리 그 바닷가에서 머무는 시간의 손을 잡고, 바다가 해를 삼키듯 나는 아쉬움을 삼킨다. 햇살이 어루만지던 후의 얼굴은 석양의 그것처럼 붉고 따뜻했으며 또한 애틋했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것은 단지 시간뿐만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그저 흘려보냈을 소중한 날들에 대한 짧은 후회를 눈앞에 가져다 두고 가벼운 탄성과 함께 노을의 끝을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뜨거운 촉감을. 손과 손이 만났을 때 피부 위로 가벼운 전류가 맴돌았고 시간은 잠깐이지만 멈추었으며 시선과 시선은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지는 해를 바라볼 때와 같았고 헤어짐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만남에 대한 간절함은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꽃들처럼 지지 않고 완강하다. 만남과 헤어짐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해도 이별의 슬픔조차 당연해질 수는 없었다. 눈물이 강이 되어 흘러도 속절없는 그리움의 모래들은 결코 모조리 쓸려내려가지 못하고 굽이굽이 남아 흔적을 남긴다. 그 얕은 모래 위에서 상처 입은 가슴을 두드려도 잊을 것은 잊어야 한다. 하지만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한파 속에서도 여전히 후가 남긴 심장은 따뜻해서 아직 식지 않은 피가 온몸을 돌고 그래서 살아있음을 상기시켜준다.


그 여행은 후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후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칼에 찔린 사람은 후의 친모가 아니었다. 양육권 다툼에서 승리한 후의 아빠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후를 데려가는 일의 마무리를 하러 온 참이었다. 후의 부모는 이미 이혼한 지 오래였고 후가 돌아갈 곳은 예전의 집이 아니었다. 역시 되돌아갈 입구 따윈 없었던 것이다. 후는 아빠에게 여변호사가 칼에 찔린 일을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후의 아빠는 거기에 덤으로 후에게 앞으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과 이어질 모든 일정에 차질 없이 응하겠다는 서면 약속까지 받아냈다. 후는 울고 있는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울지 마. 내가 돌아가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하나만 약속해줘. 나를 잊지 않겠다고.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후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지 마. 돌아가면 안 돼. 더 힘들어질 거야."

후는 양손으로 내 두 손을 감싸며 말했다.

"약속해줄 거지? 난 그거면 돼."

나는 끝내 후의 두 눈동자를 외면하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후가 가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후는 떠나야만 했다. 어른의 억센 손길에 끌려가듯 내게서 멀어지는 후의 손이 결국 나를 떠났다. 명이 이모가 뒤에서 나를 안았다. 명이 이모는 울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어른은 슬플 때 울지 않고 다만 분노한다는 걸. 명이 이모는 침착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그들의 실루엣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마도 후라면 지금 명이 이모가 어떤 마음일지 모두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난... 그때 명이 이모가 내 눈을 가리며 말했다.

"작은 명아. 네가 날 닮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 넌 후가 아니란다. 후처럼 되려고 애쓰지 마. 후가 한 말 잊지 않았지?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들으려 하지 마.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기억하고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가장 큰 의미가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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