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혼자 있을 수 있지? 배고프면 냉장고에 먹을 것 있으니까 돌려 먹고. 경고하지만 절대 도망칠 생각은 마라. 금방 다시 오마."
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후가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아빠라는 사람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나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나던 성격은 여전했다. 후에게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아빠의 잔상은 표독스러운 차가움처럼 감정이 잔뜩 묻은 부서진 조각들 뿐이었다. 지우고 지워도 파편처럼 마음에 박힌 기억들은 결국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여자 변호사라는 사람이 입원한 병원을 향하겠지. 눈빛이 닮았어, 안하무인격인 태도와 표독스러운 표정까지. 어울림이란 그런 거겠지. 자기는 다르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똑같아.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을 고르지. 자신의 결점이 가장 덜 부각될 사람. 서로가 너무나 비슷해서 그런 걸 걸고넘어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 그래. 어쩌면 편안함이란 그런 것일 지도.'
덜컹하고 열린 문이 스스로 닫히고 새어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곳에 어둠은 없었다. 바깥의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인위적인 빛이 자동으로 켜지며 공간을 구석구석 비췄다. 움직임을 감지해 불이 켜지는 곳. 이런 세상이라면 어둠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돌아온 집은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후에게는 다행한 일인지도 몰랐다. 후가 과거 이곳에서 느꼈던 사람의 온기란 분노, 시기, 질투, 아집, 갈등의 혼합이었다. 수많은 형태의 마찰에서 파생된 열기가 집안을 후덥지근하게 채웠고 그 답답한 공기로 호흡하면 할수록 마음에는 떠나고픈 욕구만 가득 차오르곤 했다. 사람은 더하기도 빼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후는 차라리 아무도 없는 지금이 좋았다. 공간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예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모두 씻어내고 싶었다. 마르지 않은 머리에 날아든 재처럼 덕지덕지 붙어 털어낼 수도 없게 되기 전에, 그 탁한 기억의 잔재가 다시 마음을 잿빛으로 물들이기 전에 모조리 긁어내고 싶었다.
겨울은 차갑고, 겨울 물은 더 차가웠다. 보일러가 고장 난 탓인지 마음 깊은 곳까지 찬 기운이 스미는 듯했다. 그동안 시리다며 외면해왔던 그 모든 것들은 겨울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었나 보다. 후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명이 누나가 보고 싶었다. 따뜻했던 그 시간,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아무렇지 않았던 사소한 일상이 벌써 그리워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내 것이 아니라며 포기의 다리를 건넜던 다짐도 무색한 채 후의 마음은 또다시 그곳을 바라보려 했고, 후는 그것이 두려웠다. 가까스로 눌러둔 어떤 생각이 다시 떠오르려 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붙들고 사는 것만큼 절망적인 오늘은 없다. 두 눈을 꼭 감고 한 차례 심호흡을 마친 후는 한참을 바라보던 물줄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호기로움도 잠시, 머리가 정수리에서부터 수직으로 두 동강 나는 것 같고, 처음은 묵직하고 끝은 날카로운 통증이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같으며, 단 하나의 강력한 감각이 다른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충격에 후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빼고 만다. 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처음 느껴보는 그 차가움의 진면목에 진저리 친다. 신기하게도 분명 몸 어딘가가 쿡쿡 쑤셨고, 마음은 그보다 더 아프고 어수선했던 것 같은데,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수 초간의 진지한 고통이 그 모든 잔상을 한 번에 날려버린 것 같았다. 고통은 통로가 하나뿐이어서 작은 고통은 큰 고통에 덮어진다더니 정말 그런 걸까. 얼얼한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데 제대로 씻어내지 못한 비누거품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다시 그 찬물에 몸을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던 후는 수건으로 대충 훑어버리고 만다.
후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보면 생각하는 일에 염증이 생긴다. 그럴 때면 생각을 없애버리는 편이 이롭다. 생각은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썩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후는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지없이 생각의 수레바퀴는 돌아갔고 기억의 영사기는 화면을 비춘다. 그 전자동 시스템을 멈추는 건 12살 남자아이에게는 아직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른 흉내를 낸다고 해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배운 것이 많아도 이룬 것이 많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사회적 명망도 있었고, 직업적 성공도 거두었으며 무슨 무슨 전문가 하는 타이틀도 꽤나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오고 버틴 시간이 '나이'라는 숫자나 명함에 붙은 몇 가지 호화로운 직책에 반영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사람됨을 대변할 수는 없나 보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는 현재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무리 숨기고 감추려 해도 힘든 순간에 보이는 모습 하나하나가 그의 진면목을 발가벗기고 만다.
후는 그 모든 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건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매력적인 능력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지옥이다. 처참한 위선을 보고 싶지 않아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려도 소리는 공간을 돌고 돌아 귀를 파고든다. 제발 들리지 마. 듣고 싶지 않아. 그런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겉과 속이 정반대를 향하는 모습을 끝내 느끼고 마는 현실이 날카로운 면도날로 심장을 한 꺼풀씩 도려내는 것처럼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다. 믿고 싶었고, 닮고 싶었고, 따라 하고 싶었던 어떤 존재가 그토록 무너지는 건 슬픈 일이었다. 부모라는 존재가 안겨준 실망은 후의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흔들었다. 토할 것 같은 현실 속에는 어떠한 절실함도, 그곳에 머물 이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아무런 이유도 남지 않은 곳에 후는... 또다시 돌아와 있었다.
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뜬다. 흐른 눈물로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있다. 손등으로 눈물자국을 쓱 훔치며 입술을 깨문다. '젠장. 왜 또 이딴 생각을...' 후는 수첩을 꺼낸 첫 장을 펼친다. 사진 속에 세 사람이 웃고 있다. 선명이 양팔로 후와 소명을 감싸 안고 있다.
바라보다가 웃는다. 또, 그녀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운다. 그녀의 웃음 한 번에 나도 웃고, 그녀의 한숨 한 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사랑은 시곗바늘이 상대방을 향하는 것. 나의 하루가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어 그녀 곁을 맴도는 작은 반딧불이 되는 것. 그녀와 함께한 1분 1초에 질량이 더해지고 몸은 그녀의 곁을 떠나도 마음만은 늘 그곳에 남아 그녀를 바라본다. 매일 다른 그녀의 향기가 천리향처럼 나의 영혼을 이끌고 보이지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선 하나가 그녀와 나의 심장에 연결된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내 삶의 이유가 되고 목소리의 울림이 나의 삶에 공명하며 그녀의 고통이 나를 신음하게 한다. 무거워진 추억은 기억에서 밀어낼 수 없다. 결국 주머니에서 어떤 추억을 꺼내도 한 사람뿐이다. 짧은 시간은 긴 시간을 덮어버릴 수 있었다. 후는 그녀를 바라본다. 후는 자신을 감싸 안은 그녀를 본다. 후의 시선이 향한 곳... 그 끝에는 선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