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16

소명

by 작가 전우형

그림자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른다. 태어나던 날을 기억하는 건 부모의 몫일뿐 아이의 몫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자에는 그들의 출생을 기억할 부모가 없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누군가를 뒤쫓고 따라다니는 것 또한 매우 특별한 관계다. 뒤섞인 우연 속에서 만남의 이유를 특정 지을 수 없다고 해도 이끌림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이끌림에 대한 분석과 해석만이 그림자가 자신이 누구에게서 태어났을지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안돼!"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집으로 들어서던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주춤했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문틈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쳤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여자는 그러지 못했다. 작은 그림자의 정체는 '소명'이었다.


선명이 물었다.

"너 이름은 기억하니?"

여자아이는 수줍게 말했다. 너무나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소명(小明)"

"소명? 어떤 뜻인지도 아니?"

선명이 되묻자 여자아이는 설명했다.

"제가 태어나던 날 작고 밝은 달이 웃고 있었대요.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래요."

소명은 그저 선명을 닮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도 '작은 명이 이모'라고 스스로 지었다. 그전까지 불리던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야'였고, 어떤 때는 '너'였으며 또 어떤 때는 '어이, 거기 너, 그래 너 말이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어?'였다. 이름을 묻는 사람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름은 소명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름을 묻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 사람과 닮은 이름을 갖는 일도 좋은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이 소명에게 작고 밝은 달이었다.

태어남이란 삶에 의미가 부여되는 일이라고 했다. 소명은 새로 태어나서 좋았다. 소명은 짧고도 강렬한 노을 직전의 태양이 자신의 가슴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비추기를 원했다.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해가 지지 않으면 달을 볼 수 없더라도, 그마저도 없다면 자신은 아무런 빛도 낼 수 없기에. 무언가에 기대어야만 빛날 수 있다면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라도 쥐고 곁을 맴도는 것이 유일한 생의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소명은 달처럼 지구 곁에 맴돌며 같은 태양을 바라보고 싶었다.

헤매던 수많은 밤이 있었고, 밤마다 달이 있었다. 동그란 모양이었다가 작고 가늘어졌으며 어떤 날은 그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달은 늘 어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밤 나그네의 오늘을 밝혔다. 달빛의 그림자는 은은한 모습으로 밤의 어둠과 조화를 이뤘다. 세상이 그렇듯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거친 잣대로 구분하지 않았고 결핍을 편견과 연결 지어 낙인찍지 않았다. 낮과 다른 밤의 그림자가 소명에게는 위안이었다. 밤의 그림자에 비친 세상의 외로움이 소명의 우울을 차분한 어조로 위로해주었다. 그런 존재였다. 후도, 명이 이모도, 그리고 달의 그림자도, 밤의 어둠도. 닮고 싶었다. 소명은 자신의 삶에도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후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무엇이건 돕고 싶었다. 후가 괴로운 고민 따위 하지 않길 바랐다. 출구 없는 터널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지 않길 원했다. 소명은 후가 자신을 보던 눈빛을 기억했다.

'후는 나를 걱정하느라 괴로운 결정을 내리려고 했어. 후를 괴롭힌 어른들은 벌 받아 마땅해. 후를 구하려면 내가 죽어야 해.' 칼끝의 차갑고 뾰족한 느낌이 소명의 살갗을 스치고, 헤아릴 수 없는 공포가 소명의 손에 부르르 진동을 부른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실행의 준비를 마친다. '그들이 더 이상 후를 괴롭힐 수 없게 할 거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복도 너머로 후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뭐가 안된다는 걸까?' 두 사람이 문을 살짝 연 채 주춤거린다. 고개를 돌려 후를 보려고 한다. '안돼. 더 기다려선 안돼.' 무작정 뛰어든다. 후의 외침이 귀를 파고들지만 이미 멈추기엔 늦었다.

"소명아, 안돼!!"

소명이 그녀의 품을 파고들려는 찰나 발끝이 문턱에 아무렇지 않게 '탁' 하고 걸린다. 칼끝이 자신을 향하도록 쥐고 있던 소명의 손이 속절없이 가까워지는 바닥에 저항하는 본능적인 동작으로 땅을 짚으려는 방향으로 바뀐다. 급박한 순간, 칼의 방향에 신경 쓸 틈이 없고 중력의 기세마저 더해진 부엌칼이 수직으로 세워진 모양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여자의 복부에 사정없이 내리 꽂힌다.

두 여자가 하나로 엉킨 채 바닥을 뒹군다. 여자의 위로 소명이 쓰러졌다.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붉고 따뜻한 액체가 바닥을 적시고 차갑게 굳어갔다. 선홍빛이 점차 언뜻 그을음과도 같은 검붉은 색으로 화하는 모습이 죽음이 예정된 이의 눈동자처럼 힘없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거칠게 소명을 밀어낸다. 소명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어찌 된 일인지 온몸에 칠갑된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서서히 깨닫는다. 옆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채 옴짝달싹 못하는 여자의 하복부에는 소명이 쥐고 있던 칼이 손잡이만 남은 채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무덤 위에 핀 가시나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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