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21

빨리 감기

by 작가 전우형

선명의 말을 곱씹어보는 후. 잘 지내길 바란다고? 인형처럼 생각을 지운채 숨만 붙어있는 삶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에 답하듯 선명이 말을 잇는다.

"후야. 잘 지내는 건 특별한 게 아니란다. 너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돼. 어디에 있건 너는 너야. 그것만 기억하렴."

선명의 휴대폰에서 통화 착신음이 들린다. 저장된 번호를 확인하던 선명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다.

"후야. 누나 말 듣고 있지? 스스로를 흔들어대지 마. 버티다 보면 밤은 지나가기 마련이야. 다른 전화가 와서, 이만 끊을게. 잘 지내야 해, 꼭!"

그 말이 끝나고도 선명은 긴 호흡이 한번 오갈 동안을 더 기다렸다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후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둔다. 그러는 사이 이미 통화는 끊어진 뒤다. 목소리가 사라지면 한 사람의 존재도 사라진다. 그것이 전화가 만든 어처구니없는 세상이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원래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도 어디로든 도망치는 것이 가능한 일방적인 세상. 그런 하자투성이의 세상이라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선명은 전화가 만든 세상의 특이점대로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선명이 후의 대답을 끝내 기다렸음을 후는 모른다. 후의 침묵과 눈빛의 언어가 만들어내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선명은 알 수 없다. 점멸하는 백열등처럼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불완전한 회로 속에서 누군가는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해 아쉬워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신음한다. 전화가 끊어진 뒤의 공백에는 그런 아쉬움이 묻어 있다.

메마른 땅에 썩은 씨앗 뿌리듯, 낮은 목소리로 툭툭 내뱉는 몇몇 단어의 집합은 화자조차도 누구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한정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목소리의 태생적 한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흩어지는 바람의 목적지가 터무니없이 먼 곳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결국 그 말은 공간을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올 뿐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할 누군가에게 이 말들이 전해졌으면 하는 불가능의 희망을 품는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상대방이 듣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혼란스럽다. 홀로 간직할 때만 부작용이 없는 말들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감만큼이나 외로움의 무게는 무겁고, 혼자 남은 시간을 버거우리만치 짓누른다.


선명은 후의 통화가 끝났음에도 이어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많은 생각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선명은 걸려온 전화의 목적을 떠올려본다. 오래도록 잊은 채 살았던 번호로부터 이토록 공교로운 시점에 걸려온 전화가 우연일 리 없었다. 후의 아빠가 후를 데려간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때와 멀지 않은 현재라는 시점이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후와 같은 능력을 가진 아이가 최종적으로 도착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특별한 아이들을 암암리에 개미 소굴처럼 모아서 연구하는 곳. 선명이 어린 시절 자랐던 그 시설, 그 연구소다. 당시 선명과 함께 머물렀던 아이들은 모두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숨이 붙은 채로 그곳을 벗어난 사람은 선명이 유일했다. 저주받은 번호가 어째서 다시 자신을 호출하는 걸까. 선명은 이어질 대화가 자신에게 어떤 소식을 전하건 결국 후회로 끝날 것임을 직감한다. 후의 소식을 그의 부모에게 알렸던 자신의 선택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소명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선명이 가진 그 어떤 선택지에도 후를 돌려보내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스스로 그의 부모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선명은 후를 진심으로 아꼈고 세상에서 그를 이해할 존재가 자신밖에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후는 소명을 만난 뒤로 잃어버렸던 괴물을 다시 만나고 말았다. 겨우 잔잔하게 만들어 우리 속에 집어넣었던 괴물이 다시 뛰쳐나와 후를 괴롭히고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건 커다란 유혹과 같아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조종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아이는 없다. 선명은 오랜 훈련 끝에 그런 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고 후에게도 차츰 방법을 알려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후는 이미 교묘한 말들로 어린 소명을 조종하고 있었다. 반드시 의도적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대상의 손발을 묶어버리기도 하며, 모든 약은 부작용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결국 8살 여자아이의 마음이 허물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녀가 머뭇거린 탓에 결국 소명은 그 어린 마음으로 칼을 집어 들었고 때마침 찾아온 후의 아빠와 법률대리인이 아니었다면 그 칼끝은 스스로를 향했거나 그토록 사랑했던 후를 해칠 수도 있었다.

후를 되찾은 후의 아빠는 콧노래를 부르며 후의 몸값을 흥정하기 위해 연구소를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만난 특이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며 그 정보를 이용해 추가금을 받을 가능성을 타진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후의 아빠가 언급한 여자가 십오 년 전 연구소에서 탈출한 선명임을 직감했을 테고 그 결과가 현재 걸려온 전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선명은 전화를 받는 대신 무감각한 얼굴로 창가를 바라볼 뿐인 소명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대체 이 아이의 어떤 점이 후를 자극했던 걸까. 두 사람을 막다른 길로 몰았던 걸까.


선명은 이 소녀의 슬픔이 안타깝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은 결국 각자의 고독을 짊어져야만 한다. 등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은 도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훼방이다. 결국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고독의 무게를 스스로 견뎌내야만 한다. 성급한 도움은 적응의 시간을 고무줄처럼 길게 잡아당긴다. 시간에는 탄성이 있어서 잡아당긴 시간은 결국 원래대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유보되었던 고통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여전히 붙잡힌 순간에 머물러있던 당사자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그 순간을 걸어 나와야 한다. 느린 걸음일지라도, 눈물 한 방울에 한 걸음씩밖에 걷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스스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건 타인이 도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명은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언제나 그랬다. 타인의 고통을 제 것처럼 알아버리고 마는 일은. 신이 타인의 껍질밖에 볼 수 없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타인의 속내를 고스란히 아는 사람은 늘 감당할 수 없는 자책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위선만큼이나 누군가의 소원, 바람, 희망, 슬픔, 절망을 아는 일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알고도 모른 채 지나치는 일은 늘 자기기만의 느낌을 불러일으켰고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주홍글씨처럼 남겼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신랄한 초상화가 거울처럼 눈앞에 아른거릴 때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나무 탁자에 칼로 글씨를 새기듯 그런 순간은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소명은 물끄러미 한 사람의 때 묻은 시간들을 바라본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시간에 흔적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후가 남긴 흔적은 유난히 골이 크고 깊어서 어지간한 시간으로는 덮어지지 않는다. 인연에서 파생된 수많은 결과물 중에는 원고와 피고를 온전히 구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누가 누구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 누가 이별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식으로 재판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연의 두께는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잠깐의 만남이 평생 길어도 마르지 않을 추억의 우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음의 크기는 자로 잴 수 없고, 나이가 어리다 하여 얕고 보잘것없는 것도 아니다.


때마침 한 사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소명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지나간 길에, 그의 발걸음이 잠시 머물렀던 땅끝마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향기가 아스라이 맴돈다. 고독이 겨울 나그네처럼 옷깃을 여며도 사람의 온기 드나들 작은 틈은 남기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잠깐의 만남이 온종일 구름만 가득할 것 같던 오후에 반짝하고 해가 내비칠 때처럼 반가웠다. 소명은 분명 자신이 몰랐을 사람으로부터 익숙한 그림자를 느낀다.

헤어짐과 이별이 관계의 온전한 종결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므로, 또 그렇다고 믿고 싶으므로, 머무는 공간과 지나치는 수많은 배경 어딘가에 미련은 채색되지 못한 수채화처럼 남아있다. 텅 빈 현관. 이리저리 나동그라진 신발들. 불 꺼진 거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모양 그대로 멈춰버린 집. 마치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고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은 듯 어색하다. 컵의 손잡이가 정리된 방향. 그릇이 정리된 모양새.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채워져 있던 물건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투명한 존재감이 쓸어도 쓸어도 사라지지 않는 먼지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뿌옇게 변한 지금의 공간 속에서 후의 얼굴만큼은 너무나 선명해서 소명은 도저히 집의 내부를 바라볼 수 없다. 이제는 느낄 수 없는 한 사람의 숨소리와 온기, 잠투정, 부스럭거림.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을 빨리 감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시간은 개별적으로 흐른다. 한 사람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이유는 어떤 순간을 오래 붙들고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접하는 모든 순간들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어렵다. 그런 순간은 기억에 오래 머무르고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낀'다. 남은 시간이 짧을수록 시간은 더 빨리 도망친다. 나이 든 사람은 순간을 붙들고 싶어도 붙들 수 없다. 순간을 붙드는 건 결국 기억의 악력인데 나이가 들수록 그 악력은 약해진다. 지워지는 속도가 머무는 속도보다 빠르다. 시간의 청개구리 같은 속성이 사람을 약 올린다. 당겨도 오지 않고 붙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임의대로 멈춰 세우고 또 빨리 지나가게 하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을 빨리 감는 방법은 분명 있다. 그것은...


'잠드는 것뿐이야.' 소명에게 후는 그렇게 속삭이곤 했었다. 8살까지 거리를 떠돌았던 소명에게 시간은 너무나 끈질긴 존재였다. 아귀 떼처럼 달려드는 세상의 모든 순간들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적절한 잠자리조차 없는 삶 속에서 깊은 잠에 드는 법을 잃어버렸던 소명을 다시 잠들 수 있게 해 준 이가 후였다. 하지만 후는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할 수 없었다. 소명은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죽도로 싫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후의 말처럼 자고 일어나면 끈질긴 시간이 흘러가버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렸으면 했다. 그때가 언제 건, 심지어 후를 만나지 못했던 살얼음판 같던 순간이라도, 갈 수만 있다면 지금의 후회스러운 마음을 씻어버리고 거리를 나돌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