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22

눈치싸움

by 작가 전우형

논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콘크리트 길은 내년 봄을 준비하는 퇴비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답답함에 창문을 내리던 후 아빠는 바깥공기를 들이마실수록 속이 매스꺼워지는 탓에 코를 부여잡아야만 했다. 그는 파워 윈도 스위치를 거칠게 반복적으로 눌러댔다. 그런다고 창문이 빨리 닫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친 눈동자로 앞만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주먹으로 스티어링 휠을 부서져라 두드리기 시작했다. 종전의 상황을 되짚어보는데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조용한 시골길은 갈 곳을 잃은 클락션 소리만 아우성치고 있었다.


희미한 여명 아래로 교각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철탑이 가로로 누운 형상의 뼈대만 앙상한 교각은 산과 산 사이를 구름다리처럼 이어주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 교각은 거친 산세에 감추어져 있던 웅장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의 끝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교각의 한쪽 귀퉁이로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아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거대한 버스 두 대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그 버스들은 상대편에서 오는 차량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좁은 산길 한가운데로 과감하게 질주해왔고, 그는 버스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핸들을 꺾어야만 했다. 그의 차량이 오른쪽 산벽에 거의 파묻힐뻔하며 멈춰 선 사이 버스는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다가오던 속도 그대로 멀어지더니 산길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놀란 가슴을 달래다 뒤늦게 분노가 치밀었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려 이미 멀어진 버스의 뒤통수에다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어보았지만 그곳까지 들릴 리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화복무문(禍福無門)이라더니... 참... 하루가 사납기 그지없군.'

후 아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이 뽀얀 담배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꽤나 매서운 겨울 날씨였다. 하지만 연구소를 향하는 길은 그보다 몇 배 더 싸늘하고 험한 것 같았다. 후 아빠는 이번 일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점점 더 확신하기 어려워졌다. 후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이제는 미뤄두었던 뒷일을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토록 순탄치 않으니 어쩐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하는 묵은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이미 산짐승과 한 차례 거친 인사를 나눈 탓에 보닛 한쪽은 움푹 파여있었고, 이제는 오른쪽 전조등마저 눈을 감은 듯 어두침침해졌다. 양쪽 눈을 모두 잃어버린 차량을 보고 있으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새벽하늘이 길을 밝혀주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이 험한 산길을 맹인 지팡이 두드리듯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달려온 탓에 다시 돌아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터덜터덜 교각을 향해 느린 속도로 다가가는 그의 차량 뒤쪽으로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급격히 가까워지더니 이번에는 거대한 트레일러 4대가 연이어 추월해갔다. 그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멍하니 행렬을 쳐다볼 뿐이었다. 험한 산길을 제집 드나들듯하는 트레일러의 행진에 기가 막혔지만 다행스럽게도 트레일러의 거대한 바퀴에 밟히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다만 운전석 쪽 사이드미러가 통째로 날아갔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오늘 겪은 일들 중에서 심각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죽을뻔한 위기를 연거푸 겪은 그는 뭐라 따지고 들 힘도 없이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남은 길을 달릴 뿐이었다.

'밤새 사람은커녕 차 한 대도 마주치기 어려웠는데. 새벽 눈 뜨자마자 이런 차들이 떼 지어 돌아다닐 줄이야. 대체 여긴 어떤 곳인 거야?'

하루의 시작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 일이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삼킬 수 없는 불안이 그의 가슴을 거대한 트레일러처럼 흔들고 지나갔다.


버스에 타고 있던 아이들은 종전의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평온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의 눈동자는 마취된 실험쥐의 그것처럼 흐리멍덩하고 선명하지 못해서 옆에서 볼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차내에서 유독 한 아이의 눈동자만이 또렷하게 바깥 상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226'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그 아이는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 1대가 산벽을 들이받고 연기를 내뿜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눈동자가 두 차례 크게 흔들렸을 뿐 양손으로 입을 꼭 막은 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10살도 안된 이 아이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로운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나잇대 아이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 파악 능력임에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을 매섭게 살피는 눈길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조차도 당장은 앞을 살피기보다 왼쪽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버스 맨 앞좌석과 뒷좌석에 앉아 있던 험악한 인상의 경호원 중 한 사람도 덜컹거리는 차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상태를 주욱 훑고 있었다. 반응을 억누르기 힘든 상황이 있었고, 그런 상황은 아이들의 상태를 체크하기 좋았다. 특별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경호원은 이내 자리로 돌아갔고 버스 운전수 역시 이내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무심히 본업에 충실할 뿐이었다.


시골길을 벗어나자 의외로 큰 4차선 도로가 나타났고 내비게이션의 남은 거리가 줄어든 것이 확연해졌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조박사였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른다.

"박사님.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카페 맞죠?"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량 스피커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맞습니다. 들어오시면 바로 제가 보일 겁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조박사가 후 아빠를 반긴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로 들어선다.


후 아빠는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다짜고짜 조박사에게 거친 음성으로 성토한다.

"연구소를 왜 이런데 지어서는, 제가 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아십니까?"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카페 내부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는 소리치듯 퍼붓고 나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듯 씩씩거렸다.

"세상에 그 좁은 산길이며, 커다란 버스에 트레일러까지! 새벽에 마주친 그 버스들, 분명 연구소에서 출발한 거 맞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조박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이미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차량의 상태를 눈여겨본 그였다. 조박사는 저간의 사정을 짐작한다는 듯 민감한 부분부터 입을 열었다.

"차량은 저희가 수리해 드릴 겁니다. 맡겨두고 가시면 차후에 댁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대체할 차량도 제공하겠습니다. 노여움 푸시지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신 나간 차들 때문에 제가 외진 산길에서 비명횡사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조박사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슬쩍 끊으며 끼어들었다.

"아버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그 버스 기사들 반드시 찾아서 단단히 주의 주도록 하겠습니다. 혹 다치신 곳이 있다면 치료비도 당연히 전액 저희가 부담하고요."

후 아빠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는 듯 하자 조박사는 능구렁이처럼 본론으로 들어간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오신 목적부터 논의하셔야죠."

후 아빠는 힘든 상대를 만난 듯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오면서 당한 일을 핑계 삼아 협상 우위를 선점하려고 했는데 조박사의 능수능란한 대응 탓에 더 따지고 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다시 새벽의 일을 언급하자니 구실도 부족하고, 다 해결된 마당에 억지로 물고 늘어지는 모양새가 될 것이 뻔했다. 그는 현재의 스탠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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