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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아빠는 즉각적인 대답 대신 명함부터 들이밀었다. 조박사는 명함을 받아 한차례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성함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박영식 씨, 그런데 아드님은 어디 있습니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아들을 데려올 수는 없으니까요."
"대략의 설명은 이미 들으신 줄로 압니다만?"
영식은 조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박사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야 알고 왔지요. '유토피아 행복 연구소'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도 물론이고요.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제 아들이 이곳에 필요한 건가 하는 점입니다."
조박사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쭉 폈다가 다시 원래의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왔다.
"불편한 질문인 줄 압니다만 먼저 여쭙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여기 왜 오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 연구소를 찾는 분들은 모두 두 부류입니다. 그 외의 분들은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 않으시죠."
"그 두 부류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이를 치료하려는 분과 아이를 팔아 돈을 벌려는 분들입니다."
영식은 순간적으로 카페 내부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다른 테이블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귀가 쫑긋거리며 무어라 수군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낯빛에 붉은 기색이 맴돌았다. 영식의 음색도 자연스레 거칠어졌다.
"그래서, 제가 어느 쪽으로 보이십니까?"
조박사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곳에 오시기 전까지 아버님의 행적을 좀 살펴보았습니다. 저희 연구소에 처음 연락을 주셨던 건 2011년. 2014년에는 아이 양육권 문제로 아내분과는 결별, 법정 다툼을 시작하셨고요. 연구소에 실제로 방문하신 건 10년이 지난 지금이로군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제가 그걸 왜 답해야 하죠?"
조박사는 서류를 검토하듯 담담한 음색을 이어나갔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수차례 공고를 내셨더군요. 어떤 이유에선지 경찰에 실종신고는 하지 않으셨고요. 지루한 양육권 다툼에 이혼소송까지, 채무도 상당한 상태 시구요. 그래서, 아이는 찾으셨습니까? 재판은 승소하셨고요?"
영식의 표정이 차라리 차분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 이유가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그런 문제라면..."
조박사는 흐름을 끊으며 또다시 끼어들었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테지요. 저희 연구소에 맡겨지는 아이는 대략 5세 전후입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오히려 적응이 수월한 편이지요. 하지만 아드님 일로 처음 문의하셨을 때 나이가 2살이었으니 지금 아드님은 12살이 되었겠군요? 충분한 설명과 설득 없이 행동이나 선택을 강요할 수 없는 나이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아드님 설득은 성공하셨나요? 순순히 저희 연구소에 입소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던가요? 그랬다면 오늘의 자리에 동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분이 무얼 그리 캐물으시는 거죠? 약 올리는 겁니까, 지금?"
조박사의 눈에 이전과는 다른 빛이 맴돌았다. 그의 입꼬리에 슬며시 웃음기가 맴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향후 아드님의 신변을 저희 연구소에 일임해 주십시오. 대가로 현재 가지고 계신 채무 전부를 대납해드리겠습니다. 그에 더해 10억을 일시금으로 드리죠. 어떻습니까?"
영식에게 부모로서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승원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부자관계도 그중 하나였다. 깨어진 유리조각을 다시 이어 붙여도 그 유리창은 약간의 충격에도 흩어져 내리고 만다. 승원이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이였다. 다섯 살도 되기 전에 부모에게 인간적으로 질려버린 아이와 어떤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식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박사의 페이스에 질질 끌려간다는 불쾌감 때문이었다. 조박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조박사와 연구소를 비롯한 그 무엇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당장 그들이 승원이를 데려가 무슨 실험을 벌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를 생각보다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전자는 시빗거리를 찾기 위해 억지로 짜낸 핑곗거리였지만 후자는 진심의 고백이었다. 만약 이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음으로써 어쩌면 훨씬 더 큰 걸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그들이 이토록 내게 사탕발린 말을 던지며 어르고 회유하는 것은 그걸 깨닫기 전에 얼른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한 속임수는 아닐까...
고민 중인 상대에게 적합한 대응방식은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조박사는 그 원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 압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어차피 아버님은 그 아이를 통제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었다면 다섯 살 밖에 안된 아이가 집을 뛰쳐나갈 일도 없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능구렁이처럼 사람 속마음을 알아차리는군. 설마...?'
영식은 순간적으로 승원이와 함께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 앞에 섰을 때 영식은 벌거벗겨진 채 수많은 관객 앞에 선 느낌을 받았다. 그 눈동자 앞에 있는 한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드러나버릴 것 같았다. 수치심에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승원이가 그녀 곁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를 직감했다.
'그 여자는 분명 승원이와 같은 부류였어. 가만...?'
"그런데 승원이가 5살에 집을 나간 걸 어떻게 알죠?"
"처음 연락 주신 날부터 아드님을 포함한 박영식 씨 가족의 신변은 저희 연구소의 감시 하에 있었습니다."
"그랬으면 왜...?"
"아시겠지만, 저희에게 그럴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일찍 저희를 찾아오셨다면 지금의 대화는 훨씬 더 이른 시점에 이루어졌겠지요. 그 부분은 저로서도 굉장히 아쉽습니다."
영식은 아까부터 조박사의 이 느물 느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대응은 정중했고 특별히 나무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영식의 속내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조박사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을 정도였다. 일을 어서 마무리 짓고 돌아가지 않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편이 그들에게 작은 방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던 영식에게 또다시 조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님을 찾으셨을 때 같이 있던 여자가 있었을 겁니다."
영식은 뜨끔하며, 이제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들이 모르는 건 대체 뭘까?
"아드님을 되찾은 것은 그녀의 연락 덕분이었을 겁니다. 저희가 아버님 일에 마냥 무관심했던 것은 아님을 알아주십사 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조박사는 오늘 보인 표정 중 가장 차갑고 단호한 표정을 마지막 말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뱉어나갔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에 대한 관심을 끊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이번 일의 보안유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영식은 마지막 대화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들에게 있어 꽤나 중요한 존재라는 걸. 그리고 조박사는 결코 그녀나 승원이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걸. 영식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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