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의 로스팅

by 작가 전우형

집을 나섰다. 잊어버릴 뻔했던 바로 그, 겨울이다. 해가 떴음에도 기온은 영하 12도. 봄은 아직 멀었어라고 시위하는듯한 아침이 나를 반긴다. 바닥 곳곳이 빙판이다. 걸음걸이가 소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 걸음씩 디딘 발걸음마다 마찰 정도를 확인한다. 문득 주위를 보니 나만 그러는 것 같다. 대범해지려다 단박에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서는데 아픔은 없고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쏜살같은 걸음으로 차를 향한다.


구멍 난 직물 시트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앞유리에 서리가 잔뜩 앉아있다. 녹이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켠다. 얼음골 앞에 선 것처럼 찬 바람이 불어온다. 차라리 밖이 더 따뜻할 것 같다. 차에서 내려 하늘을 본다. 티 없이 맑고 푸르다. 해는 여름처럼 크고 밝다. 처남이 사는 호주는 요즘 여름이랬지. 태양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어도 '겨우' 낮과 밤의 비율, 그러니까 태양빛을 쐬는 시간의 길고 짧음 하나만으로 계절이 여름과 겨울로 나뉜다니. 새삼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지구가 초라해 보인다. 그럼 그 지구에 기생해서 사는 70억 인간 중 하나뿐인 나는? 지나치게 철학적인 질문이다. 엉덩방아를 찧어서 그렇다. 충격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이다.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졌다. 요즘 들어 좀처럼 베개에서 머리를 떼기 어려웠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카페에 거의 다다랐음에도 오픈 시간이 1시간 반 가량 남아있었다. 내친김에 로스팅을 시작했다. 수두룩한 빈병을 보고 있으니 절로 의지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겨울 날씨는 로스팅 시간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보다 1~2분 정도는 더 걸린다. 700그람짜리 로스팅 기계로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그 사소한 차이가 거대하게 느껴진다. 특히 같은 1시간을 로스팅했을 때 배출된 원두의 양을 보면 확연하다. 여름이었다면 지금쯤 바스켓 2개가 가득 차야 하는데 이제 겨우 1.5 바스켓밖에 없다. 기다림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이다. 투입하고 배출하는 데까지 대략 15분의 시간이 걸리는데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책을 펼쳐도 곧 덮어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스트레스만 받는다. 흐름이 이어지려 할 때 다른 것들이 툭툭 끼어드는 상황은 최악이다. 그래서 보통 '멍'을 시전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트리에 장식된 전구의 반짝임에 눈을 맞추곤 했지만 오늘은 아침이라 적절치 않다. 대신 가스난로 앞에서 멍을 시작했다. 불멍이다.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간다. 드럼도 빙글빙글 돌고 있을 것이다. 서서히 수분이 날아가고 초록색이었던 생두가 황색 계열로 변하다가 점차 갈색과 캐러멜 색으로 익어가겠지. 마치 초록잎에 가을이 덧씌워지던 지난 9월처럼.


수도관이 얼어붙었는지 온수도 먹통이다. 오래된 단층 건물이라 이 정도 추위에는 방법이 없다. 챙겨두었던 보온병을 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한 모금을 호로록 들이킨다. 보온병은 겉은 차갑지만 속은 뜨겁다. 가스난로 앞에 쭈그려 앉은 나는 겉은 뜨겁지만 속은 차갑다. 사소한 온기의 교환이 소중하고 반갑다. 추운 날은 더욱 그렇다. 따뜻한 피가 온몸을 맴돈다. 왼쪽 가슴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심장이 예열된 걸까? 아니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핫팩이 이제야 온기를 발하는 모양이다. 꺼내 쥐고 얼어붙은 손을 녹인다. 모든 것이 차가운 겨울이다. 원두를 담고 채프를 털어낼 때 쓰는 철제 바스켓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차갑다. 공랭식 냉각기가 최상의 성능을 발휘하는 계절이다. 200도 넘게 달궈진 원두가 차갑게 식는데 3분도 걸리지 않는다. 만져보면 미약한 열기도 남아있지 않다. 바스켓에 부어두고 다시 가스난로 앞에 붙어 몸을 녹인다. 정신이 멍할 정도로 춥다. 하얀 입김이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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