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아트홀에서 에릭 요한슨 전 관람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슬아슬하던 차에 결국 주유 등이 점등되었다. 나름 요즘 차인 2019년식 쏘렌토는 내게 경고하듯 '주유 등이 점등되었습니다. 가까운 주유소로 안내해 드릴까요?'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요'를 눌렀다. 아직 50km는 더 갈 수 있었고 집까지 남은 거리는 30km였다. 집 근처로 가서 늘 가던 주요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혹 가던 중에 길이 막히면 어쩔 것이며 주유비 조금 아끼려다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서기라도 하면 그만한 불상사가 없고, 급격한 경사를 만나면 시동이 꺼질 수도 있으며 자칫하면 수리비가 수백 든다는 걱정에서였다. 불안은 전파력이 빠르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전파력이 강할 것이다. 덩달아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도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그중 막내의 천연덕스러운 물음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아빠, 그런데 기름이 없으면 차는 어떻게 돼?"
3. '연료'를 채운다.
글쓰기에 있어 연료를 채운다는 것은 휘발유나 경유를 제 때 채워주는 것처럼 끼니를 잘 챙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육체노동은 분명 '밥심'에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몸은 제대로 먹지 않으면 일할 수 없고, 전문 스포츠인의 식사량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고기뷔페 사장님이 씨름선수단이 들이닥쳤을 때(물론 요즘은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미간에 내천(川) 자가 절로 그려지는 것은 다 경험이 있어서다.
글쓰기 역시 충분한 체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를 두둑이 채우는 것이 필수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배가 너무 부르면 소화시키느라 잠이 쏟아지고 머리는 오히려 먹먹해진다. 물론 너무 허기가 지면 배고픔을 참아내느라 글쓰기에 투입해야 할 '인내심'이 엄한 곳으로 새어나가고,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에서처럼 창작이나 문학에 대한 욕구는 고차적 욕구여서 생존에 관한 1차적 욕구, 그러니까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이 충족되지 않으면 에너지가 공급되지 못한다. 그러니 최소한의 식욕을 달래면서도 식후에 많은 에너지가 빼앗기지 않도록 적절한 식단을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시간은 금이고 그중에서도 정신이 명료한 시간은 '다이아몬드'다.
글쓰기의 관점에서 '채운다'는 행위는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보다는 충분한 '휴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적절하다. 무엇보다도'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매트리스를 사용하고,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밤 10시에서 새벽 2시에는 꼭 잠을 자주라는 식의 '수면과학'을 언급하고자 함은 아니다. 필자는 방법론적 측면은 강조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아무리 좋은 방법으로 정평이 나 있어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이라고 해도 자기한테 맞지 않으면 차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수면 패턴이야 본인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 부엉이는 부엉이대로, 일찍 일어나는 새는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의 루틴을 만들어내면 충분하다. 다만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태도'다.
작가에 꿈이 있고 그 일을(부업이든 주업이든) 지속하고 싶다면 거기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작가는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다소 다른 직업이다. '나인 투 식스, 에잇 투 파이브'와 같은 워크 타임에 대한 어떤 공식이 성립되어 있다기보다는 24시간 직업의 성격이 짙다. 물론 이것이 24시간 내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니터라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날의 빈 여백이 자동으로 채워지는 기적을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작가는 일하는 '시간'보다는 작업 '시즌'으로 구분되고, 그 기간 동안은 사실상 쉼 없이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필자 역시 전문 작가가 아니다 보니 유명 작가의 삶을 반추해보면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보인'다는 말로 대신했다.) 작업기와 휴식기가 나누어지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작업기는 비단 평소에 글감과 소재를 꾸준히 찾아서 축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 속의 많은 유혹들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의미도 있다.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 그리고 코로나 시대에 들어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이 대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것들에 시간을 빼앗기면 남은 시간에 작업시간을 확보하려고 할 테니 어떤 식으로든 수면 시간은 부족해지기마련이다.
4.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출근길 정지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 양 옆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앞머리에 이마만 한 사이즈의 헤어롤을 감았고 슬리퍼 차림에 목이 긴 하얀 양말을 신은 학생이 정강이 중간까지 접어 올린 츄리닝 바지를 입은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스마트폰을 양손에 거머쥐고 바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도 눈이 갔다. 그곳에는 코트 정장 차림의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양손 또는 한 손으로 코에 닿을 만큼 스마트폰을 가까이 대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펜으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시 길을 가는데 행인 1이 스마트폰을 가로로 누인 채 손에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단지 오늘 아침 출근길의 특별한 장면은 아니다. 너무나 흔해서 이제 거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광경이다. 우스갯소리로 요즘 사람들은 서서도 앉아서도 걸으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그리고 잠들 때까지도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손바닥보다 스마트폰 화면이 더 자주 보이고,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 화면이 마치 손금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도 들린다. 거울 대신 스마트폰 화면을 사용하는 묘한 현상도 생겨났으니 이제 자신의 얼굴마저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어제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가 핸드폰만 쳐다보는 모습에 참다 참다 결국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아이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자신에게만 향한다는 얼굴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지만 그런다고 가족 간의 살가운 대화가 다시 이어질 리 없었다.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아무리 자제시켜도 부모가 24시간 아이를 따라다니며 말릴 수 없으니 그만 포기해야 하는가 싶은 마음도 들 정도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에게 스마트폰은 쥐약이다. 요즘 쥐 덫을 실제로 마주칠 일이 드물지만, 여전히 낡고 오래된 건물에서는 종종 쥐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끈끈이가 잔뜩 발린 쥐덫에는 쥐가 눈독 들일만 한 무언가를 올려다 둔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쥐는 오도 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신세가 된다. 스마트폰도 이와 비슷하다. 그 속에 너무나 유혹될만한 것들이 많아서 도무지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기가 힘이 든다. 오죽하면 스마트폰 중독을 담배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선상에 두고 평가하게 되었을까.
스마트폰에 사로잡히면 늘 피곤한 눈과 정신으로 그 작은 화면 속에 맴도는 수많은 그림과 영상, 글자들을 본다. 정신을 갉아먹고 피로감을 높이는 주범이다. 물론 SNS다 뭐다 하며 스마트폰을 통한 소통이 일상이 된 시대에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글 또한 스마트폰 브런치 앱을 통해 보는 이가 더 많을 테니까. 필자 또한 브런치에 발행할 글의 최종(물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지만 일단은) 퇴고는 스마트폰으로 한다. 그 화면이 독자가 실제로 볼 장면이니 환경에 맞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제하는 자세다. 특히 다른 때는 차치하더라도 글쓰기로 마음먹은 시간이나 잠자리까지도 스마트폰의 그림자를 질질 끌고 들어가면 안 된다. 잠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면 질 좋은 수면은커녕 수면 시점이 30분에서 1시간은 더 늦어지는 게 당연하다.
5. '틈새'휴식을 취한다.
조용한 시간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는데 좋다. 글쓰기에서 '채움'이란 때때로 '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움은 일상생활에서 수 없이 직면하는 사사로운 갈등, 불필요한 생각, 해소되지 못한 감정 등을 떨쳐내는 행위다. 나의 경우 30분의 운전 시간을 활용한다.
예전에는 필자도 운전 중에 늘 라디오를 틀어뒀었다. 2010년에서 2011년 즈음이었나? 진해-부산을 출퇴근하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40km 조금 넘는 거리를 가는데 교통체증이 얼마나 심한지 2시간 반에서 3시간이 걸리곤 했었다.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답답해 듣기 시작했던 게 라디오였다. 사실 그전까지는 TV 방송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어째서 라디오 같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하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라디오 방송에 의지해 지옥 같은 장시간 정체를 겪어내면서 완전히 해소되곤 했었다. 시각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없는 운전자의 입장에서 그 시간의 고충을 견디는데 라디오 만한 것이 없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오후 4시에서 7시를 걸치는 시간대였고 그 시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줄줄 욀 정도로 당시의 라디오는 내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운전 중에 라디오를 끄기로 했다. 처음에는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였지만 점차로 그 잠깐의 고요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멍 때리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유를 들어보면 시간을 버리는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많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펼쳐 들기만 하면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느낌을 주는 스마트폰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운전 중 라디오를 껐을 때 그 조용함 속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고 새로운 생각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는 운전 중에는 노래도 틀지 않는다. 비어있는 시간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 사람들은 평소에도 너무나 많은 것을 처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공백 같은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 짧은 공백마저도 많은 유혹들에 위협받고 살아간다.
휴식은 잠깐이라도 그 모든 유혹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체험해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놓고 조용히 걷길 바란다. 걸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저 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것도 좋다. 늘 울려대는 단톡방이 있다면 알람을 잠시라도 꺼두고, 운전 중에는 라디오도, 블루투스도 볼륨을 완전히 줄여두는 것도 좋다.
어떠한 소리도 장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그때, 그동안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것들을 가지고 당장 뭔가를 해야 한다고, 기록해야 한다고 안절부절못할 필요 없다. 조용한 생각 속에 떠올랐던 것들은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끄적일 때 함께 삐져나온다. 당장 쓰임이 없더라도 훗날 도움의 손길로 나타나고, 무엇보다도 그런 생각들은 숙성의 기간을 가지는 것도 좋다. 숙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챕터에서 다뤄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