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어야 보배'같은 당연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뺑반'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과거 경찰이었다가 지금은 다 허물어져가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의부 '정채'는 미제사건으로 남을 위기에 처했던 청라 사거리 뺑소니 용의자의 '특정'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하는 '민재'에게 핀잔 섞인 한마디를 던진다.
"야 인마! 그거 하나만 가지고 조서 쓸래?!"
여기서 '특정'이란 용의자를 특정 지을 수 있는 확실하고도 명백한 단서를 의미한다. 글쓰기로 보면 핵심 아이디어나 가장 굵은 줄기로 비유할 수 있다. 핵심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글을 쓸 수는 없다. 그건 주연배우 한 명만으로 영화 한 편을 찍겠다는 말과 같다. 무릇 나무라면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풍성한 이파리와 꽃, 열매 등이 있어야 한다. 물론, 배우 한 명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는 있다. 기둥만 앙상하다고 그 본질이 나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변질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재를 향한 정채의 애정이 담긴 일침은 확실한 증거라도 뒷받침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는 조언임과 동시에 내게는 어떻게 하면 보배로운 무언가를 만들지 고민하기 이전에 일단 구슬부터 열심히 모으라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아마도 장편소설을 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짤막한 글 한두 편은 핵심 주제나 자신의 생각, 주요 사례 한두 가지만으로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글에서 무언가가 담긴 '글'로 변모되어가는 과정,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책으로 모습과 형태를 갖추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전투 중 실탄이 소진된 병사와 같은 심정에 휩싸였다. 스타크래프트 인트로의 한 장면, 그러니까 앞에서는 흉악한 외계 생물체가 쏟아져 들어오는데 잔탄을 가리키는 숫자가 점차 줄어들더니 '0'이 되어 깜빡거리는 해병이 된 것 같았다. 쓸거리가 궁색해지고 마른걸레 짜내듯 작업을 이어나갔지만 나오는 것은 없고 압박은 심해져갔다. 그때부터 내 눈에는 '꿰어야 보배'라는 말보다 '구슬 서 말'이라는 문구가 눈에 더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떻게 '구슬 서 말'을 모을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다. 구슬 서 말을 모으는 방법은 '메모'와 '숙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메모
메모는 말 그대로 '메모'다. 좋은 글귀, 대사, 장면 같은 것을 메모해두는 것이다. 수첩을 활용해도 좋고 사진을 찍어두어도 좋다. 다만 사진의 경우 사진에 담긴 생각과 감정이 소각되기 전에 정리 작업을 거치는 편이 좋다. 출처나 용도 등을 분류해두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그림 파일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수첩은 가급적이면 식구를 불리지 않는 것이 좋다. 생활계획표를 너무 잘게 쪼갠 것처럼 실용성은 없고 지키기만 어려워진다. 이 때는 이 수첩, 저 때는 저 수첩 하는 것은 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실천은 어렵다. 갖고 다니는 것도 일일뿐더러 어디에 메모할지 고민하느라 메모 자체가 부담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수첩 한 권을 그때그때 나눠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정 구분이 필요하다면 '수기 노트'와 '아이디어 노트' 정도만 구분해도 충분하다. 수기 노트는 원고를 손글씨로 쓸 때 활용하는 노트를 말한다. 너무 작으면 안 되고 적절한 크기의 줄 노트를 사용하면 된다. 집필 장소가 몇 군데로 압축될 테니 노트북만 한 사이즈로 골라서 가방에 같이 넣어 다니는 것도 좋다.
아이디어 노트는 수시로 꺼내 쓰기 좋은 포켓 사이즈를 추천한다. 딱딱한 표지가 있는 스프링 노트가 사용하기 좋다. 완전히 펼칠 수 있고 하드보드지 형태의 표지가 받침 역할을 해줘서 손으로 들고 쓰기 편하다. 노팅 팁으로 날짜와 시간, 장소, 상황 등을 같이 써두면 좋다. 메모를 언제 어디서 썼는지 함께 기록에 남겨두면 메모의 활용도가 올라간다. 작은 펜이나 연필 등을 꽂아둘 수 있으면 공간이 있으면 더욱 좋다.
숙성
'숙성'은 꽂히는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바로 글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당장 소재로 활용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금 쓰는 글도 '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3주가량 고민하며 숙성시킨 글이다. 그때그때 조금씩 글로 옮겨두긴 했지만 연속적으로는 소설을 집필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인 것처럼 느껴져도 정작 글로 옮기면 용두사미가 될 때가 많다. 불씨는 타올랐지만 땔감이 부족한 탓이다. '구슬 서 말'이 뜻하는 것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이다. 노력 없이는 구슬을 모을 수 없다. 취재나 발품도 필요하고 직접 경험이 필요한 소재도 있다. 숙성에는 3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사유, 자유, 공유'다.
'사유'는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뒤집어서도 생각해보고 반대로도 생각해보고 완전히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도 보고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생각이란 달리 '관심'이라는 말로 치환될 수도 있다. 무언가에 관해 집요하리만치 생각한다는 것은 거기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음과 같은 말이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면 평소에 그냥 지나쳤을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컨대 아무 상관없는 영화 한 편을 보다가도 다른 떼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어떤 대사가 그물에 걸리고 책을 보다가도 어, 이 문장 괜찮은데? 하고 낚싯대가 당겨지는 식이다. 사람들의 지나치는 말 한마디도 그냥 들리지 않고 운전하다가도, 샤워하다가도 갑자기 덜컥하고 관련 주제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 주제에 대해 쓰고 싶다면 숙성기간 동안 그것을 꽉 문채 놓아주지 않아야 한다.
'자유'는 생각과 상상의 고삐를 조여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걸 쓸 수 있을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고 떠오르는 모든 것, 때로는 그것과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주욱 써 내려가는 것이다. 특별하고 재미난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다. 직접 그 사람, 그 주제, 그 인물이 되어보면 새로운 시각에서 사건이 보인다. 사고방식도 학습되기 때문에 자꾸 묶어두고 제한하면 점점 더 활동반경이 좁아진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등장했던 사막의 낙타 이야기처럼 밤새 묶여있던 낙타는 낮이 되고 줄을 풀어주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낙타를 자신에 비유하며 '묶여있던 밤을 기억하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화장실 욕조에서밖에 잠들 수 없는 자신이 여전히 과거 폭력적인 아빠를 피해 똥둑간에 스스로 기어들어갔던 그 처참한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커밍아웃하는 장면이었다. 비단 인간의 트라우마나 사막의 낙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최초의 생각과 상상은 현실에 묶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학습되고 교육받았던 그 무언가에 의해 생각과 상상은 발이 묶여버렸다. 언제나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상상하거나 생각해보지 않게 되었다. 작가라면 그 줄을 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자유'고 '문학'이다.
'공유'란 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떠올려보는 것이다. 내가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을까? 그러면서 스스로 독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내가 독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이 글을 읽으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작가는 화자인 동시에 청자이고, 수시로 글쓴이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글을 피드백하는 과정에서도 그렇고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경우에도 그렇다. 글을 읽다가도 만약 나라면 이 주제를 어떻게 쓸 것인가,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은가.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말을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나누고 싶은가. 같은 주제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글은 달라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