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차 계산을 아직 안 하셨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초인적인 인내심의 발현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테이블에 앉아 "유자차 한 잔 더 주세요."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 그 목사님들은 카페를 무슨 자기네 교회 친교실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나름 예우해 드린다고 서빙한 것이 불찰이었다. 월세며, 재료비며, 원두나 시럽, 청, 우유값은 기도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지 아는 모양이다. 그분들은 나도 시키면 그저 하나님 뜻인가 보다 하고 군말 없이 음료나 커피를 대접하는 친교실 담당 성도인 줄 아나보다. 나도 내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해가며 버텨내고 있을 뿐이라는 걸, 말해 무엇하랴.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은 어차피 말해줘도 모른다.
일만 이천오백 원. 양복 차려입은 목사님 여섯 분, 아니 다섯 분이었던가? 번쩍번쩍한 차 4대를 몰고 와서 주차장을 차댈 곳 없이 만들어놓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2시간 반 동안 나를 대여섯 번은 더 반층 높은 안쪽 테이블까지 오가게 하며 처음은 아메리카노요, 그다음은 카페모카와 바닐라라떼 투 샷, 그러고는 따뜻한 라떼 한 잔 주시고요. 커피가 싱겁다느니, 리필해 달라느니, 시럽 가져다 달라느니 진상을 부리더니 그다음은 청귤 차와 에스프레소 한 잔 추가, 마지막으로 처음 도착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원샷하신 분이 추가 주문한 유자차까지. 그 노동과 재료, 장소 제공을 하고 결재한 금액 '일만 이천오백 원'. 심지어는 그중 마지막 유자차 값은 당연하다는 듯 계산도 않고 일어서는 모습에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갈아 넣었던 것이다. 참자. 참자... 를 되뇌며 떠난 뒷자리를 정리하러 가는데 커피잔 여섯 개와 작은 에스프레소 잔, 쓰다 만 물티슈와 휴지조각, 잠깐만 쓰고 돌려주겠다며 가져간 모나미 볼 펜 4자루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차분할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실제로 당하는 기분은 또 색다르다. 그래서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던가. 다들 계획이 있다. 맞기 전까지는. 그래 나도 이 모습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래도 좋은 분들이니까, 선하신 일 하는 분들이니까 했지. 그런데 이 남은 실망은 뭘까. 그들이 머물던 내내 들려오던 회의를 빙자한 소음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대화. 말투는 점잖음을 가장했으나 결국 듣는 사람은 없는 대화. 겸연쩍은 웃음으로 갈등을 덮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오는 양보나 타협 없는 장면들. 듣지 않으려 해도 귀를 찌르는 치졸한 주장들. 젠장! 왜 이렇게 잘 들리는 거야. 카페를 채운 음악소리도 목사님들의 내실 없는 대화를 막아주지 못했다. 가져다주지 말걸. 가져다주니까 치우는 것도 당연히 안 해도 되는 줄 알지. 그래 내가 잘못한 거다. 내가. 그렇게 실망하고 또 했으면서도 뭘 더 바랬던 건지.
나는 정말 이런 진상 손님들이 싫다. 지인이라면서 반값, 그러니까 커피며 음료를 몇 잔씩 시켜먹으면서도 오천 원, 만원 내고 사라지는 사람들. 그들을 상대하다 보면 가끔 그 천연덕스러움에 놀라고, 스스럼없는 당연함에 질린다. 자신이 싼값에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서 공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정작 당사자는 그 모든 것들을 반값이 아니라 원가에 들여오고 있다는 것을 과연 한번 생각이라도 해보는지, 혹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어찌 저토록 무도한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지는지, 참으로 거기까지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들이 무수히 외치고 설교하는 그 모든 성스러운 텍스트들이 과연 설교하는 순간을 벗어나면 얼마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남아있을까 하는 한스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 재밌는 건, 이렇게 시작한 날은 꼭 '이런' 손님들만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