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모르는 남학생이 이제 막 달리기를 끝내고 결승선으로 들어와 벗어두었던 안경을 집어 드는 여학생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작가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장을 펼쳤을 때 나는 페이지와 페이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어쩌면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의 이야기다 라고 외치는 듯한, 왼쪽 페이지의 그림자가 오른쪽 페이지의 왼쪽 가장자리를 0.35cm쯤 덮고 있는 골짜기 같은 부분에 진한 갈색, 그러니까 커피번 색깔에 가까운 말라붙은 조각들이 마치 화석처럼 점점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작가는 사랑을, 그러니까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모르던 주인공이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에 한 걸음 다가서려고 주머니 속의 호기심 상자를 꺼내 슬며시 열어보는 찰나를 표현하고 있을 때, 독자는 커피 번을 한입 뜯어먹다가 진득한 빵가루를 흘리고 있거나, 거뭇거뭇한 색의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다가 자잘한 조각들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과자봉지를 거의 거꾸로 들고 모서리 깊은 곳에 남아있는 가루를 탈탈 털어먹다가 끝내 흘러내리지 않고 살짝 굳은 채 남아있던 가루들이 일순간에 쏟아지면서 그중 절반은 얼굴로 쏟아져 가루 범벅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펼쳐둔 채 눈동자만큼은 그곳을 향하고 있던 책 위로 쏟아져서 골짜기와 같은 깊고 으슥한 곳에 잔뜩 끼어버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짧은 짜증 섞인 의성어를 순간적으로 내뱉으며 책을 들고 일어서 탁탁 두드리며 털어내는데, 미처 깊숙한 곳에 낀 가루까지 완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다음 페이지부터 책을 읽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독자란 내게 이 책을 권한 사람일 수도, 아니면 그전에 책을 본 사람일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우글우글해진 책을 조금은 수줍은 표정으로 건네며 무슨 상상을 할지 겁난다는 듯이 들고 오던 날 비를 좀 맞아서 그렇다며 황급히 사연부터 설명하던 그에게 나는 자다가 침을 흘려서 그런 거라도 아무 상관없다며 안심시키던 장면도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설사 누군가 이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고 슬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침이 이런 자국을 남겼다고 해도 나는 찝찝함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들 것 같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책을 보다가 잠들 사람이란 책을 펼치자마자 졸음이 쏟아지는 유형일 수도 있고, 책을 거의 공기처럼 품고 살던 사람일 수도 있다. 후자가 우연히 너무도 피곤한 날 좀처럼 펼치지 못했던 그 책을 기어이 오늘만큼은 내 첫 페이지라도 읽고 말리라 하고 펼쳤는데 정말 첫 페이지만 읽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면. 그런 상황이 더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책을 처음 펼쳐 든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자동으로 펼쳐진 페이지는 책을 힘주어 펼치다 보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한 평면처럼 쫙하고 벌어진 상태의 그곳이었다. 책을 깨끗하게 복사하려고 있는 힘껏 누르다 보면, 팔꿈치에 난 상처가 이제 다 나은 줄 알고 조금 덜 신경 쓰다가 어느 순간 아파서 쳐다보면 굳어가던 딱지 끝이 갈라져 속에 자라나던 피부가 따갑고, 선홍빛 핏물이 미세하게 그 얇은 피부막 사이로 방울방울 새어 나오던 그때처럼, 아직 낱장이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책 표지 옆면에 색종이를 접었다 편 것처럼 완연한 세로줄이 생기며 이제 누가 봐도 헌 책이라는, 혹은 곱게 양손으로 펼쳐 들고 본 책은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마는 그런 상태가 될 때가 있다. 그런 페이지가 탁 하고 펼쳐졌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건 독자가 책을 보다가 어느 페이지를 눌러 펴고 싶다면 그게 어디쯤이면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였다.
그러니까 나는, 책을 보다가 침을 흘리건 과자나 빵가루를 쏟건, 아니면 비를 맞히건 간에 누군가가 새 책이 헌책이 될 정도로 볼만한 책이라면 충분히 다시 펼쳐볼 만한 책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걸 지도 모른다. 혹은 보다가 성가셔서 좀 저절로 덮어지지 마라 하며 있는 힘껏 눌러 편 탓에 책을 툭 하고 책상에 던져두었을 때 자동으로 펼쳐지는 어떤 페이지가 있다는 것이 그 책이 누군가에게 읽힌 흔적 같아서 살짝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게 오늘 책을 보다가 184페이지에서 과자 가루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손톱으로 긁어내다가 갑자기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다 쓰고 나서야 내가 왜 이걸 쓰고 싶었는지 발견하는 걸 보면, 배가 고픈 것 같다. 머릿속이 가끔씩 하얘지다가 문장이 조각조각 끊어지고, 손 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