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책임질 수 없는 아슬아슬한 세상에 살고 있다.

강한 힘일수록 강한 도덕성이 필요하다.

by 작가 전우형

인근 배달 전문점에는 끊임없이 배달 오토바이가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오토바이는 도로변에 덩그러니 세워져 비상등을 켠 채 주인을 기다린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채 세워진 배달 오토바이는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 그 균형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받침대가 치워지면 언제든 쓰러질 것 같다.


배달기사는 오토바이를 돌려 곧장 출발한다. 반대편으로 돌 수 있는 길이 아니지만 유유히 중앙선을 넘어 목적지를 향한다. 그들에게는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보다 배달시간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종종 큰 사고가 나기도 한다. 내가 아는 분 역시 배달기사의 사고처리비용을 처리하느라 가게를 폐업해야만 했다.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치료비용만 수천이었다. 힘겹게 운영해오던 중화요릿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넘긴 비용은 고스란히 사고처리비용으로 들어갔고, 남은 빚이 수천이었다.

배달 오토바이를 지켜보는 시선이 그리 고울 수 없었다. 어릴 적 배달 오토바이에 치여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때도 분명히 녹색 불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만 하면 집이 지척이었던 나는 녹색 불로 바뀌는 것을 보자마자 뛰어나갔고, 그 즉시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나는 2개월을 입원해야만 했고, 그때 다쳤던 양 무릎은 그 이후로도 부상이 재발되며 20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급하게 만든 걸까? 요즘은 그런 일이 적겠지만 내가 사고를 당했던 1990년대만 해도 무면허, 무보험 배달 오토바이들이 즐비했다. 나를 친 배달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토바이 면허도 없고 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나이도 어려 보였던 그 배달기사는 사색이 되어 찾아왔다.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합의해주었고 병원비만 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사고의 충격은 긴 시간 나를 괴롭혔다.


이제 내가 30대 중반의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 아이들의 등굣길에는 도로도 많고 횡단보도도 많다. 운전 중에는 험하게 곡예주행을 하는 차량과 오토바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바이크 라이더들을 비하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이 지금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왜 모르는 걸까. 위험천만한 행위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기도 한다.


재판이라는 제도가 활성화되고 법에 의해 처벌받는 사회가 되다 보니 가끔 사람들이 이상한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처벌받는 것 만으로 책임이 면제된다는 이상한 생각이다. 한번 다친 사람은 평생을 후유증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보험처리나 합의, 징역살이, 벌금 등으로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힘을 생각 없이 휘두르게 된다. 엄청난 양의 돈을 가지고 사기를 치거나 사업을 실패하기도 하며, 미친 듯이 과속하며 차를 몰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성추행하거나 성착취 동영상을 찍어 배포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들이 그 어떤 벌을 받는다고 해도 평생 모은 자금을 투자한 투자자들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사상자, 그리고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만 하는 피해자들의 상처와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다. 애초에 벌을 받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이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에 구급차를 세우고 환자가 죽으면 책임지겠다던 택시기사 역시 ‘책임’이란 말이 갖는 무게를 너무나 가볍게 보고 있었다. 그가 어떠한 엄벌을 받든 간에 그 환자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가족들의 아픔과 상처는 절대 책임질 수 없다. 그가 생명의 무게에 대한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어떤 이유로든 그토록 구급차를 막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 구급차가 무리한 운전으로 자신의 택시영업에 피해를 끼쳤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힘을 함부로 휘두르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한다.


죗값. 그렇다. 재판을 통한 처벌은 단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값어치를 치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처벌받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그 일로 말미암아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문제들은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상처는 각자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하다. 누가 그 상처를 안겨주었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온전히 당사자 본인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의 생각 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우리는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화폐가 생겨난 이래 모든 것은 돈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도 많다. 인간은 ‘자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써 그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고 대체할 수 없는 생명으로써 존중받아야 한다. 목숨 값을 책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발상이 지금의 비틀림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이런 사회상 속에서 합의금 줬으면 그만이라는, 보험금 받았으면 그만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 만연한다.


그렇기에 곡예주행을 하는 배달 오토바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조급하게 만들었기에, 측량할 수 없는 목숨을 담보로 위험을 무릅쓰는가. 저들은 자신의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많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걸까? 운전에 있어서 보험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지 면죄부가 아니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진 현대인들과, 벌 받으면, 돈 주면, 보험 처리하면 그만이라는 비틀어진 책임의식이 만나 벌어지는 끔찍한 행동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일면이다. 세상이 이토록 공포스러운 일들의 온상이 된 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착각과 만용이 불러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징역을 살거나 합의금을 주는 것 따위로 완성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생명, 신체, 정신 등과 관련된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법과 규제, 그리고 처벌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행위들을 예방하는 것에 있다. 법에 의한 처리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씌워주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수많은 피해들이 있다. 때로는 법정싸움으로 가서 그 긴 재판기간을 버텨내고 결국 승소한다고 해도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재판기간 동안 일상은 파탄 나고, 온갖 인간의 더러운 면을 경험하는 그들이 어찌 예전의 행복한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들이 그 일을 겪지 않았으면 누렸을 그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행복들은 누가 책임져준다는 말인가?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에게 병원비를 내줄 수는 있어도, 부상에서 기인하는 여러 삶의 불편이나 기회의 상실, 자존감 저하와 같은 문제들은 절대 책임져 줄 수가 없다. 성추행이나 성희롱 등으로 상처 입은 사람이 앞으로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겪어내야 할 두려움과 불신, 그것으로 인한 관계의 상실이나 사회로부터의 고립 등은 겨우 징역 몇 년 살고, 벌금형에 처하는 것으로 단 일 푼도 책임질 수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말해서 무엇하랴.


그래서 우리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절대 책임질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휘두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내가 한순간의 기분으로 또는 한 순간의 분노로 생각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작은 행위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 전반을 흔들고, 그들의 삶을 무너트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무언가를 행하기 전에 나의 행위로 말미암을 책임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세상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심각하게 살면 무슨 삶의 낙이 있고 재미가 있을까? 하지만 삶의 낙은 이런 조심스러움에 의해 침해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져야 할 부분들이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그런 요소들이 더욱 많아졌다. 집요하게, 때로는 약간 과도해 보이더라도 우리는 조심스러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자전거나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액셀레이터를 밟는 가벼운 발목의 움직임만으로도 한 가족을 몰살시킬 수 있으며, 버튼 하나로도 수십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알렸던 핵폭탄 두 발은 그렇게 재래식 전쟁의 종말을 불러오는 듯했지만, 결국은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범위를 확장시켰을 뿐이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원래 행할 수 있었던 범위와 능력을 무작위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스마트폰만 해도 그렇다. 생각 없는 댓글과 비난들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과거였다면 그들이 일종의 잘못을 저지르거나 독특한 가치관, 세계관 등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받거나 비난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상 하나를 수십억 명이 동시에 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정보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고 그 정보들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전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 파급력들은 좋은 방향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공간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단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이 능력들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재앙이 또 어디 있을까. 이미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의 삶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N번방 사건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이, 그리고 생각 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동참하는 추종자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한 번 보라. 이 세계에 개발된 고도화된 수단들을 최선을 다해서 나쁜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고방식이, 책임의식과 도덕성이 마비된 인간들이 저지를 수 있는 악독한 행위는 앞으로 더욱 다양해지고 위험해질 것이다. 렇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능력들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으로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수단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강한 힘일수록 강한 도덕성이 필요하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책임지려는 생각은 버려야 없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 무엇도 책임질 수 없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을 전제로 삼지 않으면 앞으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통제할 수 없는 야생마들로부터 더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책임질 수 없는 아슬아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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