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효율성은 허울 좋은 폭력이다. 적은 비용, 적은 노력, 적은 시간을 들여 보다 많은, 풍부한, 높은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 이러한 생각과 시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마저 자원으로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한국은 천연자원은 부족하지만 인적자원은 풍부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왔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옆에 '자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폭력적인 단어가 지닌 함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 한국인들은 인적자원으로써 고단하고 힘든 삶을 고스란히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효율성을 따지기에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일자리로부터 끊임없이 배척받고 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 역시 사회적 약자로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천대받고 있다. 이들이 천대받는 이유는 쉽게 말해 '쓸모'가 없거나 적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를 '쓸모'와 '효율'로 평가하는 시대. 우리는 현재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계급과 서열은 절대적인 지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나눌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나누어둔채, 그 기준에 맞춰 스펙을 쌓고 이력서를 채워 넣어야만 한다. 경쟁 지상주의는 자신을 보다 좋은 ‘인적자원’으로 포장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사회 저변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라는 용어가 생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었다.
인간을 효율성의 기준으로 바라볼수록 인간은 더욱 자원화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다르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분야가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획일화된 기준을 통해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 1등과 꼴찌,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구분하는 것은 효율적으로 인간을 분류하기 위해서다. 즉 서열을 만들고 줄을 세워 누가 ‘쓸만한’ 사람인지 구분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애초에 사람이 ‘쓸만한’ 사람과 ‘쓸만하지 않은’ 사람으로 어떻게 나뉠 수 있다는 말인가? 국어, 영어, 수학 '점수', 토익 '점수'가 좋은 사람이 어째서 ‘뛰어난’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 이런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와 같은 구분방식을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효율성이란 결국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목적에서 개발된 개념이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 산하에서는 돈이 되는 것,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는다. 이것을 위해 점점 사람들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효율성에 관한 한 사람은 기계를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넘겨주었다면,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야 한다. 하지만 효율적인 업무구조에 빠진 사람들은 정해진 양을 시간을 지켜 생산해내는 기계적 안정성을 최선으로 여긴다. 이제는 인간의 특수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면을 더욱 잘 흡수한 인간이 우대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인간이 오히려 기계를 닮아가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런 시대이기에 아픈 사람은 더 아프고 가난한 사람은 자신을 더욱 가난하게 여기게 된다. 좀 더 나아지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을 하는데, 일을 할수록 더 힘들어지고 가진 것은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부익부, 빈익빈은 필연이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것은 운명처럼 우리 삶에 자리 잡을 것이다.
왜 취업률이 떨어지고, 취업의 문턱은 점점 높아지며, 취업의 문은 바늘구멍이 되어가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일부 직종만을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월급이나 수익이 높거나 안정성이 높은 일부 직업들에 몰리기 때문에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만큼 자신이 뽑히기 위해서는 더 좋은 인적'자원'으로 본인을 포장해야 할 필요성만 더 체감한다.
다들 한정된 좁은 문만 바라보기에 다른 문은 보지 못하고, 그 분야는 외면받고 쇠퇴되고 거미줄이 쳐진다.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심화되고, 결국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일 뿐인데 틀린 길, 잘못된 길을 가는 것처럼 기분이 찝찝하다. 누가 비난하지 않아도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억울하면 당신도 경쟁에서 이겨 좁은 문을 통과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우리가 어째서, 왜 그토록 경쟁에 골몰하도록 강요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경쟁 자체가 이미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불필요할 정도로 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어째서 학교에서부터 성적으로 '평가'받아야 할까? 적절한 수준의 지적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잘해야만 할까? 어째서 모두가 100점을 받으면 안 되는 걸까? 상대평가를 통해 A~F까지 나누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우리는 그토록 서열을 나누는데 익숙해져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불행한 식탁 위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왔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가 돈을 최종적 목표로 삼는 한 스스로 역시 돈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한 달에 받는 월급에 따라 우리의 가치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어째서 돈이 되고 이윤이 많이 남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좋은 일이 되었을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히는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 등의 직업은 어떤 나라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이다. 이러한 직업들이 선호되지 않는 이유는 위험하고 근무 환경도 좋지 않고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이런 직업이 환영받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엘리트들이 좁은 문으로 모이고, 현재의 성적은 비록 덜하지만 그 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수년을 들여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다.
만약 이들 직업이 이윤창출에 이점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때도 지금처럼 과도한 경쟁이 일어날까? 그런 상태에서 이들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떤 계기나 목적의식, 그 직업이 하는 일의 가치나 필요성을 보고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일,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 법치국가의 법질서를 바로잡는 일, 악행을 저지른 자가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범죄가 줄어들고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 피해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일, 피해자가 마지막까지 피해자로 남지 않도록 하는 일, 나라를 운영하고 국정에 보템이 되는 일, 국민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일.
이처럼 직업으로서 가진 특수성과 그 일이 가진 본연의 가치와 필요성 등을 바탕으로 직업을 선택한다면 지금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과연 만들어졌을까? 이러한 일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으로 지금과 같은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까? 나는 현재 이러한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직업의식도 없이 돈만 바라보는 수전노이며 물질 만능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일들이 그토록 치열한 경쟁을 뚫고서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된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나 판사, 검사, 변호사와 같은 직업은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돈도 많이 받아야 하고 경쟁도 치열한 것이라고 말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의사가 되는 것이 힘든 것과 의대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사이에 어떠한 논리적 연결관계가 있는 걸까? 의사면허를 따는 것에 일정한 자격과 요구되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경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차피 그 정해진 기준에 충족된 사람들만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의사가 되는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수능점수나 학생부 종합전형 등이 그러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제한하게 되는 걸까? 그 이면에는 이미 의사와 같은 직종에 대한 과도한 환상이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돈이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 직업은 환호할만한 요소가 없다. 의사는 대단히 위험한 직업이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부담도 심하며 근무환경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도 심하다. 때때로 실수 한 번으로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본인에게도 굉장한 트라우마가 된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의사라는 직업이 그리 환영받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 나라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정말로 사람을 구하는 일에 뜻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의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성적이 좋으면 의대를 선택한다. 왜 그 일이 하고 싶은지,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저 의사가 되면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니까, 이런 이유들로 그 직업을 선택하려고 한다.
판사나 검사, 변호사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인간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일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추악하고 악독한 그림자와 욕망, 그런 것들이 난무하는 곳이 법정이며, 판사나 검사, 변호사가 주로 대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선호받는 직업이 되어온 걸까?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월급이 많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며,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분명 제대로 된 직업관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위의 직업들을 꿈꾸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돈이나 연봉을 바라보고 무작정 그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경쟁이 현재와 같이 극도록 치열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러한 직업군에 엘리트 집단들이 모여 현재의 철옹성을 쌓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무원이 선호되는 이유도 경제적인 이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직업군인도 공무원과 유사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직종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은 공무원들이나 군인들이 하는 일의 어떤 면을 보고 직업을 선택하는 것일까? 그 생활과 부담과 스트레스에 대해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그 직업을 선호하는 것일까? 공무원은 공무를 보는 사람이다. 공무란 공적인 일이며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기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응석과도 같은 민원들을 처리하다 보면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 걸까? 와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들로 위안을 삼으며 버텨야만 할 것이다. '그래도 나라에서 정해진 날짜에 월급 나오는데, 이게 어디야!' 그렇다. 이런 경제적인 이유들을 위안삼아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지금의 사회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몰리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이토록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은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곳이다. 어째서 대학 졸업장이 스펙이 되어야 하고,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가 중요해진 걸까? 대학이 왜 취업의 수단이 되어야만 했을까? 취업률 100%가 대학에서 홍보할만한 내용인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대학은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가는 곳이지 취업을 위한 중간단계가 아니다. 중등교육, 고등교육을 거친 학생들이 보다 넓은 세계와 지식을 경험하고, 사고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대한 통찰을 쌓아나가야 하는 곳이 대학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어떤 곳인가? 우리의 생각 속에서 대학은 그런 곳인가? 대학을 고르고 전공을 선택할 때마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취업률을 고려한다. 시작부터가 비틀어져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능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하고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버렸다. 일의 선후가 완전히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관심 있고 더 공부해보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고 그에 알맞은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능점수에 맞춰 대학과 과를 선택해야 하다니. 이런 학생들이 과연 학업과 공부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부모나 어른들의 조급증이 더 심각하다. 그들은 오랜시간 경험하고 쌓아온 더 강한 최면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위협한다. 너희들이 그동안 수년간 치열하게 노력해 온 결과가 내일 하루만에 판가름 나는거야! 절대 정신 차려야 해! 그런 부모들이 아이가 수험장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게 만든다. 도대체 OMR카드를 밀려 쓴 학생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같은 책을 보고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각자 느끼고 깨닫는 바가 다른 것처럼, 정해진, 정확한, 올바른 답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의 정답을 정해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학교에서부터 '정답'을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런지를 가르치기보다 이것이 정답이니 달달 외우라고 한다. 그런 세상에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우리 인생에서도 돈을 정답으로 정한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답으로 정해두면, 잘못 끼운 단추를 시작으로 이후의 모든 것들이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일이 본래의 가치와 목적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게 되고, 우리가 꿈꾸었던 오랜 희망들은 색이 바랜 사치로 치부되어버린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일과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 이러한 일들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우열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일들이 창출해내는 이윤의 격차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나름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들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필요한 경쟁이나 우열을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 더 뛰어나고 무엇이 덜 뛰어난 일이며, 특정한 일이 더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돈이라는 고정된 지표에서만 벗어난다면 이 모든 일은 각자의 특수성이 있고 그 자체로 우리 삶에 필요한 일들이다. 이것은 직업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다르고 각자 나름의 독특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원’이 아니다. 인간에게 자원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돈으로 환산된 바코드가 붙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