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 코로나가 불러온 마음의 병

파르스름한 여명 속에 갇힌 영원한 밤의 세상

by 작가 전우형

코로나 '블루(Blue)' ; 마비된 마음에 찾아온 시린 겨울


우울감은 세상을 파란색 계열로 덧칠한다. 온갖 색상이 정체성을 띄는 총 천연색으로 세상에 살면서도, 우울한 사람은 몇 가지 색으로 압축된 자신만의 세상을 본다. 그 세상은 흑백이라기보다 파르스름한 새벽 같은 느낌이다. 해가 뜨지 않는 영원한 새벽. 그래서 세상은 더욱 차갑고 얼어붙은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과 단절된 느낌에 안색은 새파랗게 질리고, 우리의 마음은 얼음보다 무겁고 차가운, 겨울 호수의 가장 아래층처럼 차갑게 식는다. 한 번 젖어든 몸은 겨울바람 앞에 서서히 얼어붙고, 온몸을 둘러싼 한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얼어붙게 만든다. 그래서 코로나 ‘블루’다. 이것은 일종의 '마비' 상태다. 코로나가 휩쓸고 있는 세상이 가져온 마음의 한기. 여기서 파란색은 그저 파랗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차가움을 담고 있다. 코로나는 세상을 감염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겨울을 몰고 왔다.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먹는 행위, 즉 섭취를 통해 에너지원이 저장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활동성 에너지로 변환해주는 것은 '신체활동'이다. 신체활동은 우리 몸에 비축된 에너지를 소모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또 다른 활력을 생산해내고 정신적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신체활동이 줄어들수록 몸이 무거워지고 경직되는 것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경직된 몸의 상태는 마음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런 느낌은 마치 모든 것이 정체되고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일상을 신발에 들러붙은 껌딱지처럼 우리를 붙잡을 때면, 초침의 째깍거림이 선명하게 들리고, 평범한 하루가 늘어난 테이프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면 무력감과 공허감이 삶의 활력마저 무뎌지게 한다.




가족에게 찾아온 코로나 특수 ; '헤비(Heavy)' 컨택트 시대


코로나가 불러온 세상은 ‘언택트 시대’라 불리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 접촉을 줄였으며, 이것은 곧 직접적인 만남의 상실을 초래했다.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영역을 축소시켜야만 했고,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이것은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상업적 영역에서 배달과 택배 시스템은 거의 필수가 되었으며, 업무영역에서도 재택근무와 화상회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육영역 역시 코로나의 영향을 비켜가지 못했는데, 학사일정에 잦은 변동이 일어나 많은 학생과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의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온라인 학습의 비중이 높아져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교육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사상 최초로 스포츠는 리그가 일시 중단되거나 무관중 경기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이것은 홈경기와 원정경기 간의 격차를 일시적으로나마 줄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사회적 접촉이 줄어든 반면 한 가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간의 물리적 접촉이었다. 코로나가 불러온 ‘언택트 시대’는 가족들에게는 ‘헤비 컨택트 시대’로 다가왔다. 일종의 코로나 '특수'라고나 할까?


현대인들이 늘 아쉬워했던 가족과의 시간. 이것이 늘어난 것은 어찌 보면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물 같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택근무로 남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아이들의 교육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며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늘어나는 것은 가족 모두가 밀착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기간이 장기화될수록 매일이 방학 같다던 아이들도 집에 있는 시간을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했고, 회사에 가지 않는 남편 역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진다. 일하는 아내는 일과 가사노동을 동시에 감당해내는 것이 버겁고, 일하지 않는 아내는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짐처럼 여겨지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든다. 가사노동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미루지 않더라도 아직까지는 많은 아내 또는 엄마들이 집이 어질러진 채 방치되는 것이나, 식사가 변변찮은 것, 쌓여있는 빨래 등을 보면서 느끼는 죄책감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죄책감이 큰 만큼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시선 역시 고울 수가 없다.




관계와 간섭 사이 ; 일급수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간섭으로 변질되는 결정적 계기는 가정이라는 공간을 투명한 일급수로 채워진 어항으로 만들려고 할 때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감시하려고 할 때 가까운 사이는 갑갑한 사이가 된다. 누군가는 이것을 관심이라 여기고, 누군가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관심이 지나치면 통제가 되고 사랑이 지나치면 간섭이 되는 것처럼, 집이라는 공간은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인 동시에 얼마든지 감옥과 같은 답답한 공간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집은 머무는 곳인 동시에 벗어나야 하는 공간이다. 인간에게는 휴식을 위해 돌아갈 곳도 필요하지만, 갇힌 에너지를 원 없이 내뿜을 활동적인 공간 역시 필요하다. 가족 간에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초밀착 가족의 형태가 되면 서로 간의 적절한 공간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심리적 공간이란 곧 자유의 정도다. 인간은 보호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자유를 꿈꾼다. 그렇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마음속의 불만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갈등 역시 빈번해지는 '관계의 역설' 속에 모두가 조금씩 불편함을 느낀다. 아이들은 이제 학교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해서 힘들어한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지만 장애물이 점점 늘어난다. 이러한 불만요소들이 코로나로 인해 변화된 환경에 녹아들고, 사람들의 원망은 이 모든 것의 원흉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하지만, 바이러스는 인격체가 아니기에 원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망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변화를 원하거나, 미안함 또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지만, 코로나는 우리의 원망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원망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원망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해결되지 않는 코로나 사태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고, 뿜어져 나오는 원망은 갈 곳을 잃는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기에 원인모를 불안이 똬리를 틀고, 불편함과 무력감이 잠재되어 있던 우울을 깨운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 블루’다. 영원한 새벽이 계속될 것 같은 느낌, 파르스름한 여명이 지평선 끝에 걸린 듯 하지만 해는 뜨지 않는, 오로지 캄캄한 밤만이 연속될 것 같은 어두운 세계. 코로나 블루의 우울은 원인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두었기에 더욱 절망적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마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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