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 뿐인데 '틀린' 것이 된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상대방의 의견 역시 일리가 있으며 그들 나름의 정의와 기준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음을 인정하자. 마음의 상처가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받아들이자.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나와 상대방의 독특하고 고유한 세상이 서로 통합될 수 있다. 보다 확장된, 다채로운 세상 속에서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고 세상을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회복할 수 있다.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는 일감이 끊이지 않는다. 세탁기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항상 돌아가지만 빨래통에는 마법처럼 빨랫감이 쌓여 있고, 돌아서면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가득하다. 바닥엔 먼지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축축한 수건, 머리카락 등이 즐비하게 늘어져있다. 고만고만한 아이가 셋이다 보니 따로 일을 벌이지 않아도 충분히 바쁘다. 혹여나 설거지거리를 남겨두면 후에 폭탄을 맞을까 두려워 보이는 대로 해치우던 터였다.
그날따라 설거지거리들이 유난히 미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육고기를 담았었는지, 튀김류를 담았었는지 여러 그릇이 뒤섞여 어느 것 하나 매끄럽게 뽀득뽀득 닦이는 것이 없었다. 기름때를 지워보려고 같은 그릇을 닦고 또 닦아보아도 여전히 미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기름기가 묻은 그릇을 같은 곳에 담아둔 누군가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촌각의 시간이 지나갔고, 문득 손을 만져보았다. 알고 보니 그릇들이 미끈거렸던 이유는 그릇이 닦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름기로 코팅된 내 손 때문이었다.
기름기 묻은 그릇을 닦던 내 손은 그것에 젖어들었고, 그 손으로 그릇을 만지면 깨끗한 그릇도 미끈거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미끈거리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내 손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운전을 해보면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외부 상황을 명료하게 확인하려면 창문을 열거나,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와이퍼로 닦아내어야만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에도 이처럼 빗물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가리어진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시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었고, 바깥세상은 차갑고 무서운 곳이라 단정지은채 의심과 공포에 질려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보는 각자의 창이 있다. 이 창에는 빗물이 흐르고 있을 수도 있고 진한 필름이 붙어있을 수도 있다. 세상을 보는 창이 무언가로 가려질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선택지를 가진 셈이다. 바깥세상이 일그러져 보일 때, '마음에 비가 내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세상이 어둡고 부정적으로만 보일 때, '우울함과 같은 진한 필름이 마음에 덧씌워졌구나.' 하고 달리 평가해볼 수 있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유리창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무작정 세상이나 상황을 탓하기 이전에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마음에 어떤 것들이 덧씌워져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지혜가 생긴다. 빗물이 묻은 차창을 와이퍼로 닦아내듯 내 마음에 덕지덕지 묻은 것들을 정리하고 닦아내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세상은 실제로 어둡고 비틀어져 있을 수 있다. 내 인생은 괴로운 일들이 가득하며 영원의 어둠이 뒤덮어버린 암흑도시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사실인지 착각인지에 대해 스스로 확인하고 판단할 제대로 된 돋보기는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난시로 어지러워진 사람은 눈에 맞는 안경을 착용해야 하듯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틀어진 사람은 그 시각을 교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것을 배제한 채, 눈앞이 흐릿해졌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 속에 세상을 원망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 세상은 캄캄한 어둠일 뿐이다. 아무리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면에 존재하는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상황만을 문제 삼아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시각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스스로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단점까지도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도구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보는 각자의 창이 있다. 이것이 사고방식이든, 감정을 대하는 태도이든, 인생관, 가치관, 결혼관이든 간에 그 이름은 중요치 않다.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자의 고유한 창을 통해 받아들이기에 특수성을 지닌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전 세계 70억의 사람에게는 70억 개의 각기 다른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각자의 경험이 곱해져 무수한 ‘인생’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각자의 고유한 세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세상 안으로 들어올 것을 강요한다.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나이가 들어야만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 방식, 경험, 아이디어, 사상, 태도 등 우리가 경험하고 체득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가치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무조건적인 '선'이라 여기는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과 집요하리만치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도 성별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꼰대'의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다.
세상에 절대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으며, 또 무조건 되는 일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의 삶은 가능성의 함수로 이루어져 있다. 함수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다. 같은 방법이라도 어떤 성향의 사람이 쓰는가에 따라, 어떤 생각을 갖고 접근하는가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인생에는 정해진 답은 없으되 자신만의 해답이 있을 뿐이다. A는 그 방법을 통해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몰라도 B가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공으로 가는 길 역시 백인백색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각을 옳다 여기는 사람의 이면에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모든 상황을 통제하에 두고 싶어 한다. 실험에는 변인통제가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조건을 동일선상에 두어야 원인과 결과의 연결선이 명확해진다. 변화된 결과치가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조건 이외에는 모든 것이 '통제'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험에서나 가능한 이상적인 환경일 뿐, 복잡 다변한 현실 속에서 변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처럼 복잡한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통제를 지극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독재자' 들이다.
독재자는 먼 나라, 이웃 행성에나 존재하는 외계인들이 아니다. 모두가 히틀러나 김 씨 일가처럼 엄청난 독재정치를 펼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성향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의외로 쉽게 일상 속에 뿌리내린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것을 넘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그들의 생각조차도 장악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세뇌와 같은 비인간적인 수단조차 괴념치 않고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의 중심이 되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 고귀한 목표를 위해서는 자신을 숙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높은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저 대단히 성실한 노력파처럼 보일 뿐 누구도 그의 진정한 면모를 알지 못한다.
일단 원하는 권력을 손에 넣으면 사람이 달라진다. 그동안 비축해온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철저한 통제하에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국가를 통치하는 거대한 모습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회사나 조직, 가정에서도 끊임없이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만이 진리이며, 최고이자 최선의 대안이라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이들이 내세우는 목적과 정의는 질서, 대의, 안정, 성공, 번영 같은 다소 합당해 보이는 것들이다. 나라가 올바르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며, 최고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통제 하에 업무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하기에 이들의 말은 사리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부모 역시 독재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부모들은 본인이 계획해둔 길을 따라오기만 하도록 아이들을 강요하며, 자신의 기대를 벗어날 때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주장하는 질서와 통제, 계획의 주체는 오로지 자신의 그것이다. 국민이나 조직 구성원,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들은 구성원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과 기준에 합당한 것을 그들에게 베푼다. 이러한 호의에는 당연히 감사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토록 노력하는 자신에게는 충성과 사랑, 대중의 여론과 관심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사람은 교묘하게 반동분자로 몰거나 서서히 자리를 잃게 만들어 바운더리 바깥으로 철저히 밀어낸다. 이것이 가정에서는 아이들의 유기 불안을 자극하거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느낄 정도의 위협적인 행동이 된다.
규모와 범위를 떠나서 각자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독재자가 된다. 그들에게 세상은 흑백논리로 가득 찬 곳이다. 자신의 말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자연스럽게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자신을 기준으로 ‘인싸’와 ‘아싸’를 나눈다. 아이들의 경우 부모로부터 미움받는 것은 생존에 큰 위협이 된다.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결국 ‘착한 아이’를 연기하게 되고, 이러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기 어렵다.
'호-불호, 정답-오답'을 나누기 이전에 그저 ‘다른’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모든 문제들이 잘잘못을 가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살인은 당연히 나쁜 것이며, 적색신호에 정지해야 하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는 질서이며 법규다. 하지만 우리가 갈등을 겪는 것은 대부분 이처럼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이 아니다.
A에서 B까지 가는데 어떤 길이 더 시간이 적게 걸리는가? 문제는 무척 명쾌하고 단순해 보인다. 세 갈래 길이 있으면 각각의 경로로 동일한 속력으로 이동했을 때 시간이 더 적게 걸리는 길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답’ 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논쟁으로 발전한 양상을 보면 결국 서로의 의견 차이를 두고 다투게 된다.
"이 길이 더 빠른데 왜 너는 굳이 느린 길로 가니?"
하지만 길이란 가는 사람이 가장 편하고 안전하다 느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고 자신에게 맞는 길이다. ‘속도’와 ‘시간’이라는 기준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선의 기준이지만, 기준은 각자에게 종속된 고유한 재산이며, 특히 인생에 대한 문제들은 더욱 그렇다.
다른 문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가 되지 않을 부분이 문제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정해둔 ‘시기’나 ‘때’에 대한 것들이 도마에 오르는 주요 재료다.
“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학교도 다니고 성실하게 공부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너는 서른이 넘었는데 왜 결혼을 안 하니? 너는 왜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않고 맨날 이모양이니? 번번이 실패하는 이상한 사업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이러한 갈등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결국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고 판단하기에 생겨나는 갈등들이다. 이미 자신만의 결론을 내려둔 채로 상대방의 생각을 끼워 맞추기 시작하면 갈등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독재자의 성향은 분명한 '폭력'의 한 모습이다. 물리적인 힘으로 억압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생각을 강요하고 무작정 따르게 하는 것 또한 그릇된 방식의 힘의 발현이다. 각자의 삶은 고유한 영역이며 누군가의 조언은 '득'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 당장에 좋은 결과를 내더라도 결국에 후회스러운 감정들만 남는 경우도 있다. 긴 미래로 이어지는 모든 변수와 또 다른 가능성을 묻어둔 채, 자신만의 좁고 ‘특수한’ 세상의 진리를 강요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그것은 욕심이며 과신이고, 자신의 욕구를 상대방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