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의 목적

작가라는 글쓰기 기계를 예열하는 것

by 작가 전우형

시계는 3개가 필요하다. 하나는 오른쪽 기계, 다른 하나는 왼쪽 기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수시로 어긋나는 자잘한 시간들을 체크하기 위해. 그렇게 3개의 스톱워치를 잘 보이는 곳에 늘어둔 채 나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펼쳐 들었다. 204쪽이었지 아마? 주인공이 배 선생의 주문서를 집어 들고 오열하던 장면. 자신을 향한 저주용 부두 인형의 주문서를 직접 받아 든 꼴이라니, 작가도 짓궂기도 하지. 줄어드는 시곗 속의 시간들을 보며 나는 책장을 넘겨나갔다. 커피콩은 익어갔고 책은 나이 들어갔다. 넘겨야 할 페이지보다 이미 넘긴 페이지가 더 많을 때, 혹은 어느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그런 감각이 문득 너무 확실하게 느껴질 때, 그런 것들로부터 도저히 등 돌릴 수 없을 때, 나는 내가 나이 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 조악한 천조각에 의미 있는 문양을 새길 수 있을까? 분명 스스로를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던 시기에는 떠오르지 않던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서부터 그것들은 생각의 한쪽 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문 밖에서 교실 안쪽을 게슴츠레 들여다보던 교감처럼 뒤통수를 콕 콕 찔러대며 말했다. 너 앞으로 얼마 안 남았다고. 나는 따가움에 졸고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질문들은 어쩌면 꾸러미 속에서 늘 속삭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시간이 빨라진다는 말은 허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더 많은 순간을 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기억력 감퇴나 뇌세포의 노화라고는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기억의 누수가 심각했다. 시간의 질량을 구성하는 것은 기억이었고, 기억의 감소에 따라 시간은 얕은 한숨으로도 휙 날아갈 만큼 가벼워졌다.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소중한 순간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져갔다. '소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순간이 없을 때도 있었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좋은 순간이든 나쁜 순간이든 기억의 일기장에 무엇이라도 있는 편이 낫겠다는 조급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마도 그 시점은 주머니에 좁쌀만 한 크기로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방치했다가, 그 구멍들이 점차 벌어지더니 어느새 중요한 기억들까지 숭숭 빠져나가버렸음을 알아차린 뒤였을 것이다. 헐벗은 공간에 이미 허전함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수위를 높였음을 알게 된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곳이 원래부터 바다였는지, 아니면 만조에만 물이 차오르는 해안의 일부인지. 분명 무언가가 남아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시간의 홍수에 하도 쓸려내려가다 보니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나는 분명 과거를 지나서 현재로 온 사람인데, 마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현재라는 곳에 뚝 떨어진 것처럼 황망하고 오갈 곳 없는 느낌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컸다. 희미한 흔적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그 순간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단서를 남겨두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는 일기장일지라도 훗날 오열의 빌미 정도는 남겨두기 위해.


그런 두려움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두려움은 나를 돌아보게 했고, 실시간으로 과거로 변해가는 현재를 조금 더 붙들 악력을 선물해주었다. 나의 순간을 분해해서 각각의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 과정은 기쁨이었다. 순간을 분해하고 그 요소요소를 관찰하는 일 또한 퍽 흥미가 있었다. 관심은 껍데기를 통과하여 형상 없는 내면을 하나의 심상으로 표현해내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은 주체로서의 나로부터 객체로서의 나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객체로부터의 나에서 '나'를 '타인'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되면서 글쓰기의 동력은 두려움에서 호기심으로, 관심과 상상은 추론과 전개를 통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타인과 나를 가느다란 실로 연결해주었고, 그런 관계 맺음을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새 참 멀리도 왔다.(내가 가끔 대화 중 참 멀리도 가신다고 애정 반 농담 반으로 말씀드리는 분이 있는데, 보셨죠? 사실은 제가 훨씬 멀리 가나 봅니다. 다음부터는 안 웃을게요.) 각설하자면 이런 진지하고도 철학적인 사유가 내가 위저드 베이커리의 남은 페이지를 헤아린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끝이 성큼 다가와 있는 책들이 있다. 끝이 궁금한 기분과 끝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내적 갈등은 점화된다.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감각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과 유사하기에. 그 블랙홀과 같은 웅덩이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삼천포가 아니라 태양계 바깥에 도달해 있을 때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다행히 내게는 시계 3인방이 있었다. 알람이 울렸고, 팝콘 튀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넓지 않은 공간은 점차 구수한 향기로 채워졌다. 기계는 주인이 하릴없이 공상에 빠진 동안에도 불평 없이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 충성스러운 모습이란. 한 번에 700그램씩. 용량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한 로스팅 기계였다. 비록 소박하나 쉼 없이 채우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하는 그 성실함과 묵묵함이 좋았다.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한 유일한 충분조건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태도이므로. 나는 잘 익은 원두를 꺼내 냉각팬에 올리는 한 편, 담아둔 생두를 투입했고, 타이머를 새로 맞췄다. 냉각이 완료된 원두는 채프를 털어내어 포장용지에 담아 입구를 봉했다. 실링기 로터리 스위치를 5에 맞추고 앞에서 한 번, 뒤에서 한 번 힘주어 누른 뒤 램프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셋을 센 뒤 손을 떼면 완벽했다. 실링 라인이 끝단에서 조금 비뚤어졌으나 뭐 어떠랴. 아직 같은 일을 최소 8번은 더 해야 했다. 두 시간이면 목표량은 채우겠지만 예열, 포장, 기계 냉각 시간을 감안하면 넉넉히 3시간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벽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2시쯤에는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 계획은 어긋나라고 있는 것이니 난 그저 같은 모양의 실천을 반복할 뿐이다. 분절 없는 초침이 환청처럼 재깍거렸다. 그러면서 또 다른 공상에 접어들었다. 투입한 만큼 배출하는 로스팅기처럼, 투입한 시간만큼 글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고의 목적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무전취식이나 다름없다. 로스팅기에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고 원두가 배출될까? 그렇지 않다. 원두가 나오려면 일단 생두부터 투입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글이 나오려면 좋은 소재가 투입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읽거나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작정 새로운 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기 행위는 생두를 작가라는 로스팅기에 투입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생두가 원두로 만들어지려면 로스팅기가 부지런히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무엇이든 글이 나오려면 써야 한다. 그런데 쓴다고 해서 글이 나올까. 아무렇게나 로스팅하면 소중한 생두만 소모되고 만다. 핸드드립으로 내려도 에스프레소 기계로 추출해도 콜드 브루로 24시간 동안 내려도 맛도 향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 쓸모없는 검게 탄 콩 찌꺼기가 되고 만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집중해서, 자신만의 원칙으로, 세심하게 그리고 끝까지 써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써도 초고는 쓰레기다. 이상하게도 쓸 때는 분명 희열에 찬 상태고 재미도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읽어보면 한숨이 쏟아진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교훈도, 주제도 빈약하고, 문장도 엉망진창에 불필요한 조사만 남발되어 있다. 그래서 거의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쓴다는 마음으로 갈아엎는 일이 다반사다. 재미있게도 로스팅 과정에서 첫 번째로 배출된 원두 역시 초고와 마찬가지다. 첫 배출분은 맛이 없다. 프로파일 대비 시간, 온도가 제각각이고 색깔과 상태도 차이가 난다. 당연히 맛도 떨어진다. 로스팅기의 예열이 덜 된 탓이다. 기계를 충분히 예열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첫 로스팅부터 프로파일에 맞추려면 기계를 평소보다 몇십도 이상 더 예열해야 하는데 그러면 로스팅 기계가 열피로로 망가진다. 그래서 첫 배출분은 일정 부분 타협을 거쳐야만 한다. 비유하자면 초고는 첫 배출분과 같다. 어떻게 공들여 써도 초고는 빈약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초고조차 써내지 못한 작가는 예열이 덜 된 로스팅 기계나 다름없다.


초고의 목적은 그 자체로서 다음 작업의 소재로 활용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작가 스스로를 예열하는 데 있다. 작가는 초고를 써야만 충분히 예열된다. 아무리 뛰어나고 제대로 된 글쓰기 비법을 갖추었어도, 작가라는 글쓰기 기계가 제대로 예열되지 않으면 헛방이다. 그런 기계에 아무리 SCA에서 공인한 스페셜티 등급 예가체프를 집어넣어도 좋은 글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초고를 누군가에게 내미는 것은 그 자체로 실례이고, 그런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주는 이가 있다면 고개 숙여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초고를 배출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쓸만한 글조차 써낼 수 없으니, 초고란 결국 작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스스로를 더 뜨거운 기계로 담금질하는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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