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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손가락

상처는 죄책감과 함께 온다.

by 작가 전우형

왼쪽 손등에는 유난히 아픈 부위가 있다. 다른 부위는 부딪히거나 긁혀도 크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데 비해 그 부위는 유독 아프고 쓰라리다. 그러다 보니 왼손의 그 부위만 매번 상처 입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많이 다치는 부위라 그때도 이곳을 유난히 깊이 다쳤던 것일까?


약 석 달 전쯤 보도블록 위를 달리다 넘어졌고 손등에 꽤나 깊은 상처가 생겼다. 한 달이 좀 지나자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고 새살이 차올랐지만, 흉터는 하트 모양으로 더욱 도드라졌고 통증은 아물지 않았다. 통증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여기 아직 상처가 남아있다고 끊임없이 나에게 어필한다. 그래서 자꾸만 아프고 관심이 간다.


그곳의 피부는 아직도 약간 거칠고 부드러움이 덜하다. 미끈거리는 것이 싫어 손에 크림 따위 바르지 않던 나조차도 자발적으로 뭔가를 손등에 펴 바르고 있을 정도였다. 마치 겨울바람을 맞은 살결처럼 작은 스크레치도 크게 느껴지고 감각이 도드라져있어, 더 아프고 신경이 쓰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마는 누구에게나 유독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아픈 손가락에는 자꾸만 관심이 가고 무의식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나에게는 그런 아픈 손가락이 바로 여동생이다.


나에게는 12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내가 30대 중반이 되면서 자연스레 여동생은 20대 중반이 되었다. 12살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이어서 동생과 나는 성장기에 대한 교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호적상으로는 오빠 동생 사이가 맞지만 오빠 동생 사이에서 흔히 떠올리게 되는 싸움이나 경쟁, 어울림 같은 것들이 생겨날 시간적 공간이 없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태어난 동생은 내가 집에 들어갈 때도 자고 있었고 내가 집을 나올 때도 자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동생의 모습은 대개 자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이 끝나고 나이 어린 동생의 말문이 트일 때쯤 나는 집을 떠나 사관학교로 갔다. 사관학교 시절에는 집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없었다. 첫 훈련에서 다리를 심하게 다쳤던 탓에 처음 반년 간은 아예 생도사를 벗어나지 못했고, 2학기에 접어들어서야 가끔 집을 찾았지만 그때도 피곤에 절은 몸을 뉘이기 일쑤였다. 동생은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거리가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생도사는 사회생활과도 동떨어져 있었지만 나이 어린 동생과 나눌만한 공통된 문화는 더욱 없는 곳이었다.


사관학교 2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금의 아내와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이때 내가 느꼈던 이중적인 감정은 사랑과 죄책감이었다.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과 집에 가지 못하는 죄책감. 나는 많은 경우 사랑을 선택했다. 눈이 멀 정도의 20대의 사랑은 내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에 겨우 1~2차례 주어지는 외박 기회를 고스란히 연애에 썼고, 집을 찾는 횟수는 점점 줄어갔다. 그렇게 나는 24살이 되어 결혼을 했고 이때 즈음 12살 어린 동생은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고, 그렇게 가족 아닌 가족처럼 멀어져 간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나는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고, 동생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고3 수능 생활을 거치는 동안 어머님은 아버님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고, 그 곁에는 어린 동생뿐이었다. 어렸던 동생은 마음 아픈 엄마를 대신해 강해지기로 했다. 부족한 오빠는 다른 가정의 가장에 충실해 보였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자라난 동생과 어느 순간부터 약간은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의 많은 상처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상처는 죄책감과 함께 온다. 여자 두 사람이 살기에 세상은 혹독한 곳이다. 아이는 철이 들고 세상에 대해 알아갈 때 즈음부터 엄마와 둘이 살아왔다. 아빠는 떠나갔고 오빠는 집에 없었다. 엄마는 마음이 약했고 상처가 깊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오빠의 걱정뿐인 것 같았다. 동생은 아마도 버림받은 것 같았을 것이다. 혼자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세상에 기댈 사람이 없다는 느낌에 냉소적이 되었지만 정작 엄마 앞에서 그것을 표현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느끼기에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였을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힘들었고, 늦둥이로 나은 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떠날 거면서 아이는 왜 나은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아이를 대하는 면면에 조금씩 삐져나왔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은 많은 것을 느낀다. 그 감정의 온도와 시린 분위기를 느끼며 아이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종종 아이와 부모는 사춘기를 함께 겪는다. 동생이 사춘기를 겪어가던 시점은 어머니 역시 제2의 사춘기라는 갱년기를 겪어내어야 했던 시점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인간관계를 내려놓았던 어머니는 남편마저 떠나며 인간관계의 완벽한 단절을 경험해야만 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겠지만 유난히 더욱 어렵고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나 역시 짐작만 할 뿐이지만 두 분이 그리 행복하게 사셨던 것 같지는 않다. 어릴 적 몇 안 되는 내 기억 속에서도 어머니는 숨죽여 울고 계셨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어머니는 모든 사랑을 나에게 쏟으셨다. 외동으로 자라며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의존적인 성격이 강했던 나는 더욱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토록 모든 사랑을 나에게 쏟았기에 또 다른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욱 버거워지셨던 것이었을지도.


책임감으로 길러진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이도 그런 부담감을 느끼며 자란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는 홀로 막막하셨을 것이다. 마흔이 다되어 태어난 이 아이를 또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나를 키우며 완벽하게 경단녀가 되었던 어머니로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십 대 중반을 넘어 오십을 바라보는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시만 해도 너무나 제약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많이 하곤 하셨다. “내가 그때 일만 그만두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공부와 배구에 소질이 있으셨고 초등학교 때까지는 배구선수를 하셨다. 하지만 키가 크지 않았고 선수를 그만둔 어머니는 공부에 전념해 상고를 졸업했고 곧바로 주산 회사에 취직하셨다. 당시에는 꽤나 유망한 직종이었던 주산 회사는 공기업이기도 해서 계속 일을 하셨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사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혼하고 나를 낳으며 일을 그만두셨고 육아에 전념하셨다. 어머니는 셈이 빠르셨고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어머니께 산수를 배웠을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였지만 어렵사리 구한 직장이 초등학교 청소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똑똑한 분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현실이 참으로 아쉬웠지만, '현실'이 그랬다. 그렇게 학교 청소일을 시작하셨고 환갑을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일을 하고 계신다.




동생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 사느라 바쁜 오빠를 생각하면 화도 치밀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하면 안 됐다. 나는 책임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나는 사실상 어머니와 동생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을 자주 찾지 않게 되었고, 그 깊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고 죄책감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떠나온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물밀 듯 치밀어 오를 때면 나는 이른 결혼을 후회하게 되었고, 이것은 지금의 가족에 대한 또 다른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모두가 소중했기에 모두에게 미안했고, 나는 언제나 죄인이었다. 그런 마음은 내가 우울증에 시름하게 되었던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였다.


연극을 좋아했던 동생은 어머니께 이런저런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꽤나 옛날 사람이고 베이비 부머 시대에 태어나셨다. 그 당시 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가장 좋은 길로 보았고,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쉽게 색이 바래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께 동생이 열의를 품었던 연극은 아마도 쓸데없는 공상이나 취미,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머니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 여기고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을 말리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는 동생이 빨리 자리 잡고 무언가 안정감을 찾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 역시 이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단정 지어 두셨을 테니까.


내가 잘 다니던 직장에서 우울증까지 오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어머니는 나이 든 아들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동생은 때로는 조금, 때로는 아주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 자신은 받지 못한 사랑을 오빠는 너무 많이 가져간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간혹 동생을 만나 진로나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건넬 때면 동생은 지극히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동생과 내 사이에는 대학 선배만큼의 유대감도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동생이 평생 느껴왔을 나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너무나 아프다 보니 쳐다보는 것조차 괴로워서 없는 듯 무시하며 살아온 아픈 손가락. 그것이 나에게는 가족이고 여동생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곳. 그리고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했던 나의 어린 동생. 그들을 떠올릴 때면 나는 항상 외롭고 슬프고 죄인이 된다. 오늘따라 그 손가락이, 손등에 난 상처가 유난히 쓰라리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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