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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자식 간의 역학관계

건강한 양육은 적절한 의무를 위임하는 것

by 작가 전우형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잘못된 면을 깊이 인식한 자녀가 있다. 그 자녀는 '나는 커서 절대 부모님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동학대가 대물림되듯, 대부분의 자녀는 성인이 된 후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전철을 답습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부모로부터 성격, 사고방식, 행동 패턴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부모님처럼 되지 않겠어'라는 다짐은 자신의 내부에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만들고, 실현 불가능한 '완벽주의'를 심는다. 당초의 마음과는 다르게 자신이 어릴 때 보아왔던 부모님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진다. 이것은 또 다른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아직 독립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부모라는 울타리에 기대어 생존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부모의 사랑과 지지를 필요로 한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자기 판단은 커다란 불안을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어떻게든 부모의 인정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형성되는 원인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을 걸림돌로 여기거나, 자녀의 양육보다 일을 더 우선시하는 부모들로부터 아이들이 원하는 인정과 사랑, 관심을 이끌어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 양육과정에서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아이들의 단점을 뽑아내는데 선수다. 먼지를 터는데 심취한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수용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사실 명확하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부모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좋은 사고방식이다. 아이는 최초에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점차 부모와의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정서적 독립을 이뤄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하지만 부모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은 도리어 좌절을 부른다. 부모와 자식 간에 깊은 유대가 형성되는 이유는, 서로가 극히 닮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자식은 부모를 바라보며 미래의 자신을 예상한다. 부모는 때때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신의 단점을 이어받은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부모는 아이들을 더 다그치는 악수를 둔다. 아이에게서 자신으로부터 이어받은 단점들을 제거시켜주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런 행위로 아이들의 단점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는 종종 아이들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인간은 통제를 통해 변화될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를 통제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변화를 오히려 가로막는다. 그 통제가 상대방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선한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통제를 통해 행동의 변화가 일어났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변화에 그친다.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의 결과로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관계 맺음에 있어 통제력이 강한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며, 누군가의 통제를 벗어날 때 불안을 느낀다. 특히 긴 시간 지속되는 부모-자식 관계에 있어 부모의 지속적인 통제 하에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통제받던 상황,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고 결정해주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은 부모 대신 자신을 보호하고 통제해줄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부모의 통제는 아이를 자립하지 못하게 만들고, 동등하지 못한 의존적인 관계를 스스로 선택하게끔 유도한다.


학대에 가까운 폭력적 억압을 휘둘러온 부모로부터 아이는 깊은 무력감을 내면화한다. 더불어 과도한 공격적 성향을 지닌 친부나 친모로부터 일방적으로 억압받는 다른 한쪽의 부모를 바라보며,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인이 되더라도 저런 방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 부모를 바라보며 자신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라도 어린 시절 뿌리 깊이 각인된, 어찌 보면 최면에 가까운 편향과 망상적 사고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깊은 무력감은 타인에 대한 극도의 반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으로 말미암아 누군가와 긍정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스스로 거부하기에 이른다. 긴 시간 누적된 근원적인 인간 혐오로 인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고,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사람조차 있는 그대로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거절하게 된다. 점점 더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이유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가만히 뜯어보면,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관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부모가 가급적 아이와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있어 '보호자'가 되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피보호자'가 되어야 함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이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피보호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부모도, 아이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필연적으로 20년에 가까운 기간을 피보호자의 입장에 놓여야 한다. 자녀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장기간을 살아간다. 이 관계를 그저 방치하다 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함부로 해도 자식은 부모를 거부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관계로 흘러간다. 만약 여기에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더해진다면 관계는 더욱더 극단적으로 기운다. 이 역학관계 안에서 정서적인 안정과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아이들은 없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노력할 부분은 바로 이런 것에 있다.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어야 한다. 더불어 아이들이 스스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편향에 매몰되지 않도록 인식을 전환시켜줄 필요가 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현재의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며, 생활적인 면을 의존해야 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들이 이미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있음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 더불어 성장 과정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서서히 독립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을 때 마음의 짐이 생기는 느낌과 같은 이치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아이들이 부모의 말에 거부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도록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모든 것이 미숙한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형성된다. 기울어진 관계를 복원해주려면, 아이들이 스스로 부모에게 도움이 된다는 자기 평가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관계의 균형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맡김으로써 가능해진다.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책임질 기회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을'의 입장에 놓이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부모가 아이와 갑을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도움받는 입장에 놓이다 보면 스스로 '을'의 입장을 자처하게 된다.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일정 지분을 내어주는 것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 중요한 양육 행위다. 의무를 다할 때 자연스럽게 권리도 행사할 수 있다. 최초의 사회인 가정에서부터 정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행해야 할 적절한 의무를 지워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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