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by 작가 전우형

스탠드 불빛이 책상 한편을 비추었다. 지금 내 앞에는 적잖이 먼지가 쌓인 노란색 레고 스포츠카, 777 손톱깎이, 3 × 3 큐브 퍼즐, 원목 재질을 흉내 낸 플라스틱 독서대, 반년쯤 펼쳐보지 않은 예전 아이디어 노트 2권, 2012년 둘째 아들 100일 때 촬영한 가족사진, 부활절 카드, 지인의 캘리그래피, 만 원권 지폐 2장과 10원 동전 2개, 포르테 차 키, 선물 받은 지 석 달쯤 되었지만 아직 첫 장도 읽지 못 한 책, 그리고 2022년 제13회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124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스탠드 불빛 하나가 비춘다고 생각하니 문득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올 때면 혼란스러워진다. 스탠드 불빛은 꽤 많은 것을 비추면서도 그것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아마도 한정된 영역만을 비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고 싶다는 충동에 빠질 때가 많다. 세상에는 몰라도 아무렇지 않고 잊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빛과 소금이라는 말. 나는 이 좋은 말을 내가 가장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다. 자신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자랑스레 소개한 그 사람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빛과 소금이 될 거야.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야."

오늘 뜨거운 물로 샤워하다가 그가 덜컥 떠올랐다. 빛과 소금이라는 말, 오늘 오전에도 들었다. 그 말과 연합된 8년 전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해서 나는 그 단어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그날의 시간과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 말에 담긴 좋은 의미를 곱씹기보다 서둘러 다른 것들을 먼저 떠올리기 바쁘다. 마치 옷에 묻은 잉크가 스미기 전에 서둘러 쓱쓱 닦아내는 것처럼.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무시할 수 없는 정신의 자국 같은 것이 남고 만다. 그 자국은 더운 여름밤 뜨거운 물을 한참 동안 들이부어도 지워지지 않았고, 나는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펜을 들었다.

빛과 소금. 분명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문제는 나였을 것이다. 나는 빛에 타들어가는 8월 가뭄이었고, 식수가 거의 바닥난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조각배였다. 그가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나는 속이 매스꺼웠고 이마가 뜨거워졌으며 타는듯한 갈증이 치밀었다. 도망칠 수도, 도망칠 생각을 할 수도 없는 곳에서 나는 빛과 소금으로부터 열렬한 포화를 받았다.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습게도 나는 그가 퇴근하고 나면 사무실의 불이란 불은 모두 꺼버리곤 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에서 생각했다. 세상의 빛이란 빛은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빛은 어디에서건 스멀스멀 새어 들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잠시 뿐이었고, 나는 익숙하고도 끔찍한 그 공간의 잔해들을 하나하나 다시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가 떠올랐다. 좀처럼 나쁜 장면은 질기도록 기억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스탠드를 켜는 일이었다. 할 일은 산더미였고 시간은 없었다. 잠들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기계였으면,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드려도 아픔이나 수치심 따윈 느끼지 못하는 고철덩어리였으면. 그럼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빛과 소금에 대한 절망이나 반감 따윈 생각하거나 느낄 겨를도 없이 빨간색으로 직직 그어진 것들은 지우고, 알아볼 수도 없는 휘갈긴 글씨나 '점찍' 따위는 써 놓은 그대로 수정해서 책상에다 던져버리고 말 텐데.

이건 그저 그와 나 사이의 문제인데 '빛과 소금'이라는 말과 결부되면서 묘하게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틀림과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반감이 기독교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만들어냈고, 더 특정적으로는 기독교'인'이나 천주고'신자'들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이어졌다. 가장 자주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저 사람은 매주 미사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길래 사람을 이토록 멸시하고 괴롭히는 걸까? 당시 나도 얼치기 기독교인이었던지라 설교 시간에 성경 몇 구절 정도는 들어보았고 그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던가 '원수를 용서하라'와 같은 내용은 있었어도, '네 아랫사람을 죽도록 갈구고 그의 고혈 하나까지 쪽쪽 빨아먹어라'와 같은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아무리 기독교와 천주교가 서로 갈라져 교리에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줄기와 가지 정도이지 뿌리까지 다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이 한 번 싫어지면 그림자도 밟기 싫다고, 그 해 나는 교회까지 발길을 끊고 말았다. 그 후로 '빛과 소금'이라는 말은 내게 금기어가 되었다. 그때부터 '회개'니 '고해성사'니 하는 말들도 모두 변명처럼 들렸다. 한 주 동안 실컷 제멋대로 살아 놓고 주일날 예배든 미사든 어디든 찾아가서 '저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시고'로 시작하는 어쩌고 저쩌고를 떠들면 뭔가 저지른 죄가 사라진다는 발상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목사님, 신부님 옷깃을 부여잡고 눈물 콧물을 쏟거나 성경 구절을 큰 목소리로 읊으면 자기 마음은 편해지겠지. 하지만 똥은 엄한 데다 싸놓고 누구한테 그 용서를 비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전과 후가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분들께서는 대체 그의 무엇을 보며 용서해주신다는 건지. 무슨 반성의 기미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마치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인양 한 주를 혼자서만 즐겁게 살아가는 그를 보며 그 면죄부를 빙자한 것들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안 좋아지곤 했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나는 그의 잘못을 하나도 용서하지 못했는데, 누가 대신 그의 죄를 면해준다는 걸까? 그런 힘듬마저 비웃는 그를 보며 그날 역시도 '빛과 소금'의 아흔아홉 번째 버전을 듣고 있으니 그 단어에 쌓인 감정이 오죽 암적으로 해로웠을까.

이미 8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고, 지금은 그때와 상황도 마음도 상처도 사람도, 그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하지만 '빛과 소금'이라는 단어에 진득하게 묻은 감정과 기억들은 여전히 떨어져 나가지 못했나 보다. 적어도 나 역시 '너의 원수를 용서하라'와 같은 과제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좋은 사람이 좋고 싫은 사람은 싫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쌍심지를 켜든 커피를 일부러 맛없게 내려주든 사소한 복수라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


기억에 스탠드를 켜고 이제는 좋은 기억들에만 빛을 비추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리고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들을 때 10번 중 한 두 번은 실수로 그를 비추더라도 여덟아홉 번은 내게 진정 '빛과 소금'이 되어주는 이들을 비추기 위해 조사 범위를 조정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 글은 말미에야 언급하지만 시작도 넋두리고 끝도 넋두리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 중 혹 기분 상하거나 불쾌한 분이 있었다면 눈 딱 감고 넘어가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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