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문제 : 여기서 자주 등장하는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by 작가 전우형

어제는 근 2년 만에 어딘가를 다녀왔습니다. 정문을 통과하는데 새삼 느껴지더라고요. 그곳이 얼마나 답답한 곳이었는지. 숨이 차는 곳이었는지. 풀밭도 나무도 담장으로 사방이 가려지는 곳. 해도 그림자 없이는 넘어올 수 없는 곳. 저는 그런 곳에 살았더라고요. 그러니 병들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반나절만에 다시 확인하고 말았죠. 제가 정말로 그곳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걸.

그날 저녁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저는 의아했어요. 왜냐하면 단지 예닐곱 시간쯤 머물렀을 뿐 그 안에서 힘들만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구나, 한 게 아무것도 없어도 이렇게 힘든 곳이었구나. 단지 그곳에서 숨 쉬고 머문 것만으로도 나는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병이 드는구나. 문득 미안해졌어요. 그런 데서 십 수년을 그렇게.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떤 감각을 억눌러왔을지 가만히 떠올려보았죠. 이제와서는 짐작할 수도 없지만 늦은 사과라도 하고 싶어 졌어요. 그러다 깨달았죠. 그날따라 하루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는 걸. 저는 일어나서 뜨거운 물로 씻고 잠이 들었어요. 다시 깨어났을 때 저는 5분 정도 지난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곗바늘로는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잠이 들었다고 아내가 그러더군요. 홑이불을 어찌나 꼭 말아쥔 채 잠들었는지, 빼낼 수 조차 없었다고. 저는 그랬어? 하고 슬쩍 미소를 흘려야만 했죠.


수첩을 놓고 간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어요. 빈 시간을 잠으로 때우기에는 버려지는 삶의 질량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거든요. 시간은 집중할수록 가속이 붙어요. 저는 정신을 쏟을 곳을 찾아야 했죠. 주머니를 뒤졌고 간이 신체 검사지 한 장을 발견했어요. 제가 원하는 건 뒷면이었죠.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순백의 공간. 저는 빈 시간을 수면으로 채우는 대신 빈 종이를 문장으로 채워보기로 마음먹었어요.

글쓰기의 매력은 아무것도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펜과 이면지 정도야 어딜 가든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특장점은 소리가 조용하고 티가 안 난다는 점일 거예요. 특히 그때처럼 시간은 자주 비는데 정해진 공간에만 머물러야 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활동이나 대화도 하기 힘든 경우에 글쓰기는 아주 안성맞춤인 놀잇감이죠.


글을 쓸 때 옆에서 말소리가 들리면 문장들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들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순간은 누군가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경우죠. 편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계속 편지를 받을 대상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여자 친구에게 보낼 내용을 엄마에게 보내는 거죠. 어라, 그러면 엄마가 혹시 더 좋아하려나? 그럼 이렇게 바꾸기로 하죠. 여자 친구 1에게 보낼 내용을 여자 친구 2에게 보내거나, 내연녀에게 할 말을 아내에게 문자로 보내버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큰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집에 가면 대개 노트북이나 수첩을 덮어버려요. 시작하기도 겁나지만 뭔가가 이루어질 것 같은 순간에 어그러지면 스트레스가 가볍지 않거든요. 그리고 거의 99%의 확률로 가정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져요.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는요.

소설 쓰는 사람을 두고 고독을 벗 삼아 일한다고 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것들일 거예요. 소설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서 늘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죠. 누군가에게 읽히길 원하지만 그 누군가의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소설을 쓰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나 화자가 아닌 채로 글을 쓰게 되면 십중팔구는 읽는 사람도 주인공이나 화자에게 몰입할 수 없는 수준의 글이 되고 말아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런 글은 늘 말하고 있죠. 당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라고. 줄거리 요약하듯이.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공간을 주지 않죠.

우리는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데도 한참이 걸려요.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도 현실에는 없는 허구에 존재하는 한 인물이 어떤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그런 인물은 소설에서 한두 사람이 아니죠. 심지어 그 인물은 처음과 끝이 달라요. 성장하고 변화하고 어떤 사건을 겪은 후에는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하죠. 그런 작업을 다른 사람의 개입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맞아요. 저는 지금 딴짓을 하는 중이에요. 어제 하루를 그곳을 다녀오느라 통째 날렸더니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힘들어졌죠.


윤대녕의 소설 '남쪽 계단을 보라'의 한 장면을 말미에 남기며 딴짓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벌써 한 달째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냉정하고 또 그만큼 상대에 대해서도 엄격한 아내는 결혼이라는 일상성에 자신이 마모되는 것을 거의 무서워할 정도로 경계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 때문이 아니라 아내는 오직 자기 자신 때문에 불임을 주장했고, 직장에서 꽤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스스로가 벌어 저축한 돈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안쓰러울 만큼 이기적이고 또 그 이기적이란 것 때문에 끊임없이 초조해했다. 내 탓도 있었으리라. 걸핏하면 영혼이 길 위에 있기 때문에, 라는 같잖은 말로 아내의 입을 막으며 휑하니 어디로 떠나곤 하는 내 기질 말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깊이 사랑하고 있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서로를 구속하는 힘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일본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와 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물론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이 서른넷에 아이 하나 없이 산다는 건 그렇다 치고 아내까지 섬나라로 보낸다는 게 무슨 이혼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끝까지 내가 수긍을 못하자 아내는 이혼 운운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삼 년의 유학 기간을 이 년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일 년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끝까지 남편임을 주장하고 싶었고 또한 아내가 그걸 수긍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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