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가 가진 의미

소설의 '소'짜도 모르던 사람이 장편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by 작가 전우형

그러니까 지금,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다행인 점은 자가 격리는 글 쓰는 사람에게 있어 그렇게 큰 방해 요소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바이러스에 걸린 지금보다 소설을 쓰는 내내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던 편두통 때문에 진통해열제를 훨씬 더 많이 복용하기도 했고. 일단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 잠시 먼저 서술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코로나 바이러스. 솔직히 감염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이보다 훨씬 더 심한 감기를 숱하게 겪어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니 실은 전혀 힘들지 않다. 아마도 백신 신고식을 매우 혹독하게 치러서 그렇지 싶다. 백신 1차 접종을 마치고 나는 사흘 밤낮을 머리를 들지 못했다. 편도선 절제술을 받은 이후로 38도를 넘는 고열은 처음이었고 40도의 문턱도 가볍게 넘었다. 하지만 다행히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를 어거지로 실천하고 있달까. 아무튼 나는 1차 접종 때 아주 제대로 앓았고 아주 제대로 항체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델타 변이가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졌던가. 하지만 아직 어려서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두 아이가 나란히 2박 3일씩 40도 고열을 찍고 사흘 째 되던 날에 드라마틱하게 열이 떨어진 것이나, 똑같이 백신 3차 접종을 마친 아내는 지금 거의 죽다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 델타 변이라고 해서 약한 바이러스는 아닌 것 같고, 내가 항체가 조금 잘 형성되었나 보다 하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확실히 뭐랄까... 다른 감기와 달리 묵직한 펀치가 소리 없이 날아드는 감각은 있다. 숨 쉬기가 어렵고 흉부가 유독 갑갑하고 가장 특별하게는 미각 손상이 그렇다. 맛이 정말, 심각할 정도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쓴 맛, 단 맛은 어느 정도 느껴지는데 비해 짠맛, 신 맛, 그 외의 섬세한 미각을 요하는 그 어떤 맛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기침이 자주 나고, 이제는 코도 살짝 막힌다. 가벼운 오한과 미열, 몸살 기운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다만 첫날 해열진통제를 두 알 복용하고 둘째 날 아침 한 알을 복용한 이후로는 진통제를 복용해야만 견딜 수 있을 만큼 힘든 상태까지는 가지 않고 있다. 다만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주 잘 지내는 중이다. 가족 구성원 다섯 명 중 네 명이 순차적으로 확진되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특기할만한 점이라면 백신을 3차 접종까지 마친 우리 부부를 기준으로 자가진단키트는 절대, 저얼대 두 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 그랬다. 먼저 감염된 아이들보다도 아내의 증상이 더 심해져서 이제 더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을 때도 자가진단키트로는 음성이었다. 아무리 코를 피가 나게 쑤셔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용자가 서툴러서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 아내는 간호사고 신속항원검사나 PCR 검사 아르바이트도 숱하게 했던 터라 그런 아내가 자가진단키트를 매뉴얼대로 정확히 하지 못했으리라고는(그것도 대략 다섯 번을 내리 실수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접접촉자 중에서 자가진단키트로 음성이라서 활동하셨던 분들 중 십중팔구는 감염된 상태로 돌아다닌 것이나 다름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러스 대란이 끝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PCR 검사에서는 우리 부부 두 사람 모두 양성 판정이 나왔다. 심지어 발열, 인후통 등 주의할만한 감염 증상이 없던 나도 양성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침, 가래, 코감기, 가벼운 몸살 등을 달고도 자신은 감염된 상태가 아니라고 믿으며 밖을 버젓이 활보하고 있을까.


여기서 짧게(?) 도입부를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너무 오랜만에 한창 퇴고 중인 소설과 다른 종류의 글을 써서 그런지 잠시 흥분한 모양이다. 이제 딱 일주일이 남았다. 공모전 접수 마감은 7월 29일 우편 소인분 까지다. 인쇄하여 제출이고 500자 분량의 시놉시스를 써야 하니 그날 오전까지는 최소한 출력해서 우체국에 택배나 등기로 부쳐야 한다.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로 기억한다. 브런치에 별다른 생각이나 계획 없이 덥석 시작했던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마찬가지로 별다른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덥석 마무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조잡한 소설을 써내는데도 굉장히 힘에 부쳤기 때문에 따로 작업공간을 구하거나 긴 스토리를 넉넉히 되돌아보고 구성을 바로잡을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이를테면 소설가가 꿈꾸는 환경이나 재능과 같은?) 다시 그런 긴 소설은 도전하지 말자,라고 결심을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갈대 같아서 그런지, 아무것도 하지 않자니 입이 궁금하고, 손이 궁금하고, 자꾸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노트에 끄적이고, 끄적인 것들을 보며 다시 생각을 굴리고 하다 보니 불현듯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그것도 당장 쓰지 않으면 천추의 한이 남을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샘솟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아무 계획 없이 쓰던 소설이 뒤로 갈수록 얼마나 난맥을 바로잡기가 힘든지 알았기에 일단 대략적인 스토리나 플롯(나는 이때 찾아보고 플롯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장면, 캐릭터, 설정 정도라도 구상해보고 시작하자,라고 소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처럼 주절주절 뭔가를 끄적여갔다. 그런데 이게 성격 탓인지, 아니면 소설이라고는 배워본 적도 없는 일천한 내 능력 탓인지(분명 후자겠지만) 세부 내용을 쓰지 않고서는 스토리고 등장인물이고 플롯이고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스트레스도 풀고 동기부여도 할 겸 펼쳤던 책이 탈고를 앞둔 지금도 여전히 앞에 펼쳐져 있는 김연수 소설가의 '소설가의 일'이었다. 거기 이런 말이 쓰여 있었고, 나는 그 페이지에서 책을 덮고 초고를 막무가내로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란 어떤 사람들인가? 초고를 앞에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74,75페이지)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저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너무나도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 그리고 위 문장의 3줄 아래쪽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온다.


"누군가가 '소설 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먼저 글을 썼고, 지금은 그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쓰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어야만 한다."(75페이지)


그러니 내가 처음 하려고 했던 일은 무모하기도 할뿐더러 일단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쓰지도 않고 생각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다니, 발상부터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마구잡이로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를 하면서 만들어낸 초고가 대략 4만 자가 조금 못 되는 분량의 중편 소설이었다. 마무리도 짓지 못했고 그쯤 되니 스토리를 처음부터 새로 보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 하던 시점에 일시정지를 누른 것이었다. 그리고 2고를 작업하면서 나는 초고가 가진 의미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초고란 내가 얼마든지 참고하고 따서 쓰고 고쳐 쓰고 바꿔 쓸 수 있는 아이디어 뱅크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씩은 해 보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에이 뭐 스토리가 저래? 내가 만들어도 저것보다는 낫겠다.' 혹은 책을 보면서, '뭐야 이거? 작가가 졸면서 썼나? 흐름도 별로고. 이 부분 나라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바꿨을 텐데.'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읽을 때 왜 우리는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걸까? 왜 더 좋은,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걸까? 답은 앞에 그대로 쓰여 있다. 우리가 이미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이미 '보고, 듣고, 읽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처음부터 그런 기똥찬 아이디어는 떠올릴 수 없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초고가 가진 중요한 의미는 그것은 수준이 어떻든 엄연한 '내 것'이라는 사실이다. 위의 경우 자신에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써먹을 수 없다. 그것은 표절이고 갈취고 강탈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도 자신의 것이 아닐뿐더러, 아이디어가 제대로 사용되려면 근간이 되어 줄 원본이 요구되는데 정작 원본이 자신에게 없어서 문제가 된다. 초고는 그래서 필요하다. 초고는 아무리 형편없어도 온전한 자신의 소유물이다. 이제 그걸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내게 시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초고를 쓰고 나면 그때부터는 예전에 타인의 것을 보며 구시렁대던 '나라면 뭐뭐 어떻게 할 텐데'를 마음껏 실행하고 시험해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초고 이후의 작업이 순탄하다거나 쉽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저 말도 안 되는 초고를 쓰고 여기부터는 2고다 하고 선포한 것이 올해 3월 12일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7월 23일이고 나는 지금 4고의 최종 탈고를 앞두고 있으니 대충 계산해도 4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2고가 완성된 것이 4월 5일, 3고가 완성된 것이 대략 6월 중순이었다. 초고가 대략 4만 자, 2고가 4만 5천 자, 3고가 10만 8천 자 분량이다. 처음 다섯 페이지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이제 200자 원고지 500매가 넘는 장편 분량으로 탈바꿈했다. 단순히 양만 불어나지 않았다. 몇 분의 지인에게 시험 삼아 읽어보게 했더니 평이 꽤 괜찮아 자신감도 얻었다. 물론, 공모전에 당선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출에 의의를 둘 뿐이다. 하지만 소설이라고는 '소'짜도 모르던 내가 장편 분량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의 핵심에는 '일단 쓰고, 초고를 보며 다시 생각해서 고쳐쓰기'의 무한 반복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이지만 이제 정말이지 다시 보기 진절머리 날 때도 있었고, 그래서 퇴고를 하다 보면 정말 토할 것 같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절절히 느낀 적도 있었다. 일과 학업, 집필을 병행하느라 1~2주 정도를 아예 내려놓았다가 슬럼프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늘 초고가 존재했고, 도저히 더 이상 뭘 어떻게 쓰고 풀어야 할지 암담할 때도 초고와 설정자료, 중간 정리한 자료, 스스로 궁금증이 드는 것들을 기록하고 답을 달아두었던 자료 등을 다시 펼쳐보면 어떤 식으로든 실마리가 잡혔다.


그러니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혹은 단순히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가 쓴 글이 재미없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인지 원인을 짚을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서 자신은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없나 봐, 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면(별로 위로가 안 되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처음 쓴 글은 누구나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 재미없던 글도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하다 보면 어라? 이거 괜찮네? 하는 순간이 온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로해 줄 김연수 소설가의 말을 소개하며 긴 글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재능이라는 소설 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죄책감 없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김연수, 소설가의 일, 23페이지)


그리고 이 구절도.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같은 책, 19페이지)


* 이 야심한 시각에도, 불금이건 주말이건 상관없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도, 자신이 쓴 글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있을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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