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이 눈밭을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평택 국제 대교를 건너던 길이었다. 나는 도로 옆 움푹 들어간 곳에 차를 세웠다. 구름 사이로 뻐끔한 하늘의 얼굴이 보였다. 비는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난간에 몸을 걸치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안성천 수위가 높아져 있었다. 어제까지는 누런 흙탕물이었던 강물이 어느새 짙고 투명한 남색으로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수면 위로 하늘과 구름과 빗방울과 교각이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졌다.
빗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지더니 깨진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며 미세한 빛을 뿌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의 궤적이 바람을 따라 춤을 췄다. 몇 개가 화살처럼 유성처럼 눈동자를 향해 쏟아졌다.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사방이 자욱하게 일그러졌다. 비는 온몸을 감쌌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나의 세포를 가닥가닥 어루만졌다. 문득 지독한 한기에 몸서리치며 나는 몸을 웅크렸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 안쪽에서부터 요동쳤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주저앉은 채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졌어, 내가. 지금 가도 돼?"
새벽 4시.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끄고 식탁 아래에 숨었다. 숨을 멈춘 채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 기척도 없었다. 나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휴대전화를 다시 켰다. 캄캄한 새벽에 하얀 불빛. 나는 눈이 멀 것 같은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는 흔적을 남겨두어야 했다.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전신성 다모증에 걸린 아이를 가둬두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했던 앙리 2세처럼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넌 네가 열등감 따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넌 다만 열등감을 느낄만한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것뿐이야. 어쩌다 가끔 겪었어도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을 테고.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 있었을 테니까. 그 빈자리를, 공허를. 넌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알아. 티 내지 않을 만큼 영리하기도 하고. 네가 열등감을 표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그런 경험도 많았을 거야. 넌 충분히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남자니까. 사랑받고 인정받았겠지. 넌 저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들의 치열함을. 옹졸함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까 봐 늘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양보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능력인지 너 같은 사람들은 몰라. 그러면서도 사랑과 인정을 독차지하지. 하지만 안간힘을 써도 작은 것 하나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은 저토록 가열하게, 때로는 이기심 덩어리처럼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미세한 목소리조차도 낼 수 없어."
그녀는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옆모습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과 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투명하고 완강한 속박은 힘을 줄수록 더욱 나를 옥죄어왔다. 거세고 강한 바람이 밀려와 그녀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결국 다른 말은 듣지 못했다.
"이제 알겠어? 너랑 나는 다른 사람이란 걸."
나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그녀의 말은 모순 투성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열등감을 모를 수도 있었다. 내가 그녀와 다른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게 잘못이라는 걸까? 그래서 지금 벌이라도 주겠다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짐작과는 달리 나는 매 순간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눈물 쏟으며 무너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 결국 하지 못했던 말을 수없이 곱씹는 미련한 사랑도 있었다. 수치심이 슬픔을 가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다가설 수 없는 현실은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다. 이제 막 태어난 망아지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절망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나는 냉장고 뒤편에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샌드위치를 뒤늦게 발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날은 유독 배가 고팠다. 멀리서 종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녀가 물었다.
"매번 그렇게 웃으시네요."
"별론 가요?"
"실없이 웃는 남자, 매력 없어요."
"등이 간지러워서,라고 답해도 될까요? 조금만 긁어주실래요?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어서..."
나는 그러면서 등을 내밀었다. 그녀는 콧김을 내뿜다가 내 등짝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손자국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등이 활시위를 당긴 것처럼 역으로 휘었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이제 안 간지럽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은 부위를 연신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거봐. 잘만 닿으면서. 어디, 또 간지러운데 없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장난인 줄 아나 본데, 또 오면 스토커로 신고할 거예요."
나는 같은 말을 벌써 2주째 매일 듣고 있었다.
팔다리를 아무리 저어도 하늘로는 갈 수 없었다. 입에서 짠내가 느껴졌다. 따뜻한 기운 하나가 차갑게 식은 갈대밭 사이로 흘러내렸다. 입술이 떨렸다. 나는 재차 물었다.
"몸은 좀 어때?"
"..."
"그쪽도."
"..."
"잔인한 말이군."
"..."
"여긴 비가 오거든."
한동안 나는 정신없이 기침을 했다.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는 얼마나 오랫동안 하늘을 떠다닌 걸까. 그리고 얼마나 빨리 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까. 가까워지는 놀란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분명 시간은 멈춘다. 그날의 비명도 그랬으니까. 내가 도저히 귀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불쑥 사라진 빈 모습을 무한히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녀는 눈앞으로 불쑥불쑥 다가오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바랐던 걸까. 나는 그녀가 보았을 강물을 뒤늦게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