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잠긴 집
2.
“저는 힘들수록 몸을 움직여요. 고통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잊히거든요.”
희영은 나무기둥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몇 번이나 헉헉거렸다. 희영의 기침소리가 이슥해질수록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커다란 손이 심장을 움켜쥐는 것처럼 답답하고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등성이에서 검은 구름이 치솟으며 거리는 어두워졌다. 나는 희영에게 다가서려 했다. 희영은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오지 마세요.”
혼자 감당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나는 의문에 저항하며 발을 내밀었다. 희영은 그에 맞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는 1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아픈 눈으로 희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파랗게 질린 표정과 달리 희영의 눈은 평온해 보였다. 마땅히 견뎌야 할 겨울의 중심에 선 것처럼. 그리고 기다리던 봄을 맞이한 것처럼. 희영은 숙였던 허리를 폈고 나무 기둥을 짚었던 손을 거뒀다.
나는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압축되며 빛과 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순간 희영의 등에서 하얀 빛줄기가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날개가 펼쳐지는 듯한 광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희영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며 말했다.
“우리 좀 걸어요.”
희영의 걸음은 독특하고 빨랐다. 병정 인형처럼 좁은 보폭으로 상상외의 속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희영의 걸음걸이를 쳐다보았고 희영은 돌아서서 내게 손짓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희영을 뒤따랐다. 희영의 호흡에 가벼운 긴장이 서렸다. 그녀와의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우리는 걸어갔다.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건반의 울림과 뒤섞이며 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음악을 좇아 다가간 곳에는 파란 기와로 지붕을 덮은 낡은 집이 있었다. 울타리에는 덩굴장미가 듬성듬성 꽃을 피웠고, 마당은 강아지풀과 토끼풀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숨죽여 다가갔을 때 피아노 소리는 점차 줄어들다가 사라졌다. 음악이 멎자 생동감이 일렁이던 그곳은 단숨에 흉가로 변했다. 울타리 문을 조심스레 밀었을 때 삐걱 소리가 아침 호숫가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우리는 벽화에 그려진 도깨비가 갑자기 이쪽으로 노려보기라도 한 듯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무심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그러다 갑자기 단단하던 손의 느낌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손을 놓은 채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한줄기 바람이 나를 지나 그녀에게로 불어갔다.
“저기 가봐야겠어요.”
“아는 집이에요?”
그녀는 시선을 그 집의 어느 한 점에 고정한 채 걸어갔다.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의 걸음에 속도를 냈다. 달리듯 문에 도달한 그녀는 세차게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잠겨 있어.”
내가 천천히 다가갈 때까지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왜 갑자기 잠겼을까요?”
“근처에 열쇠가 있을 거예요.”
“어떻게 알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눈으로 바닥을 훑었다.
“없어. 왜 없지?”
그녀의 혼잣말에는 지독한 혼란이 서려있었다. 특별히 열쇠를 숨겨둘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뻐끔했고 쌓인 물건도 없었다. 대체 무슨 열쇠를 말하는 걸까. 그녀는 뭔가를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분명히 피아노 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울타리를 짚어나갔다. 한동안 멜로디를 더듬어가던 그녀가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집을 빙 두른 울타리를 반 바퀴 돌아 주택의 후면을 보고 있었다. 쌍둥이처럼 주택의 전면과 후면은 완전히 똑같았다. 심지어 울타리의 작은 문까지.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거기에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빨간 나무 새가 그려진 우편함이 울타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동안 방치된 듯 아기 얼굴만 한 우편함 입구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있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 속으로 빙어 같은 손을 밀어 넣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