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서 가끔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괴로운 건 아니에요.”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저었다. 얼음이 잘그락거리며 투명한 유리잔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노란 불빛이 튕겨져 나오며 가끔 눈을 두드렸다. 눈을 감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기로 했다. 눈을 감으면 그녀와의 거리가 사라졌다. 마치 귓바퀴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자꾸 저를 보지 마세요.”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내게 말했다.
“감춘다고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눈을 감아도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당신의 눈빛은 지금도 여전히 저를 아프게 찌르고 있는걸요.”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도로가 거칠어서는 아니었다. 어느 바퀴 하나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물었다.
“왜 웃으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슬며시 미소를 거뒀다. 이유 없이 웃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파 해치다 손톱이 모두 떨어져 나가곤 했다. 그곳은 콘크리트 바닥처럼 튼튼하고 견고했다. 튀어나오는 대답은 늘.
“그냥. 그냥요.”
그게 내가 그녀에게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냥.
**
“사람은 왜 태어나는 걸까요?”
“그건 지금 내 손에 왜 만년필의 잉크가 묻었는가와 비슷한 질문인 것 같은데요?”
“또 그냥이라고 말하려는 거면, 진짜 죽여버릴 거예요.”
“흔적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아이를 낳는 이유가?”
“중요한가요? 이유 같은 게?”
“당신은 궁금했던 적 없어요?”
“글쎄요. 저는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없어서.”
갑자기 뒤통수가 가려워졌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나는 금강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통은 없으니까.”
그녀는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배가 꺼질 거리라고 했어요, 분명히.”
“누가요?”
“자취방을 소개해주던 할아버지요. 그런데 그게 1시간이었어요. 걸어서 1시간.”
“버스도 없었나요?”
“있었죠. 그런데 버스비가 없었죠.”
“그게 지금 나는 왜 태어났는가를 곱씹는 이유인가요?”
그녀는 사이를 두고 말했다.
“그게 다는 아니에요.”
“아까 물에는 왜 뛰어들었어요?”
“외우기 싫었거든요. 물건 가격 같은 거. 특히나 다음 날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날에는요.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벽 3시쯤이었거든요. 졸리기도 했을 거예요. 무슨 생각이든 해야 하는 시간이긴 하잖아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공주로 왔을까? 나는 왜 혼자서 여기 이러고 있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더 살고 싶지 않아 졌어요. 그래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마셨죠. 의외로 얼마 안 되더라고요. 정신도 또렷했어요. 금강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두워서 그런가, 물살이 세서 그런가. 잘 안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갔죠. 그것뿐이에요.”
내가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분명 바닥을 보고 있었다. 수면 아래로 얼굴을 집어넣고서. 그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내가 뒤에서 허리를 양팔로 안았을 때 그녀가 머리를 뒤로 젖히는 바람에 코에서는 새빨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분명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다만 다시 뒤통수로 내 얼굴을 들이받지는 않았다.
왜 이래요, 대체!
놔요! 이거 놔!
그러는 사이 나는 그녀를 강가로 끌고 나왔고 동시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공주대교 상판을 천정삼아 누워있었고 그녀는 무릎을 세운채 앉아있었다. 나는 머리를 들어보려고 하다가 거친 신음만 내뱉고 말았다. 그녀가 허리를 돌려 내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는 아직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떨어질 때 머리를 잘못 부딪힌 것 같던데.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아무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박이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어왔다.
저는 왜 태어난 걸까요?
나에게 묻는 걸까. 나야말로 묻고 싶었지. 정말 죽으려던 거였냐고. 허리까지밖에 안 되는 물에 들어가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