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8.
강물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한동안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러다 제풀에 지쳐 나오겠지. 내가 성경을 펼친 것과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글씨 빼곡한 책에 코를 박고 있을 테니 제발 누가 좀 구해주세요. 아무 답이라도 좋으니 말해주세요. 그대로 믿고 따를게요. 그녀가 강물로 걸어 들어간 건 홧김에 던진 커플링을 찾기 위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다. 물속에서 밤을 지새우기엔 지나치게 쌀쌀한 날씨였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물속으로 거의 잠겼고, 별 볼 일 없던 물살도 갑자기 거칠어졌다. 나는 그녀를 구하러 급히 뛰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을 때,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분명 저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당겨서는 그녀를 끄집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양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들었고, 몸부림치던 그녀를 힘겹게 강가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팔꿈치에 맞은 자리가 쿡쿡 쑤셨고 뒤통수에 불룩한 혹이 튀어나와 똑바로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2시간 동안 침대를 뒤척거리던 나는 결국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거실로 나왔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노란 식탁등을 켠 후에 의자를 당겼다. 나무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던 탓에 나는 공연히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벨이 울렸다. 나는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다가갔다. 숨죽인 채 작은 돋보기 구멍으로 밖을 살폈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낯선 희영의 모습이었다.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늘어져있던 후드티와 청바지를 챙겨 입었다. 그러고 나서 문을 여는 사이 벨이 3번 더 울렸고 옆집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중문을 안 달았나 보네. 저 사람들도 참.'
희영은 손에 든 검은색 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한 눈에도 묵직해 보였다.
“계속 세워 둘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비켜섰고 그녀는 손수 내 손에 검은색 봉지를 쥐어주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검은색 봉지를 벌려보았다. 안에는 귤이 들어있었다. 나는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지금 몇 신지 알아요? 귤은 어디서 산거예요?”
그녀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더니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귤 봉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귤을 까기 시작했다. 어느새 옆에는 귤껍질이 수북하게 쌓였다. 나는 그녀가 까주는 귤을 두 개쯤 받아먹다가 그 후로는 받아서 접시에 담았다. 스물다섯 개의 귤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였다.
“나가요. 우리.”
그녀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귤이 마르지 않도록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덮어두었다. 그녀는 어느새 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있었다. 옆집에서는 또 개가 짖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나는 곁눈질로 그녀를 흘끔거렸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차림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녹색 치마 위로 하얀 꽃이 수놓아진 남색 니트에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친 채였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녀를 보며 1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둘로 갈라지며 캄캄한 복도가 나타났다. 그녀가 앞서 걷자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귀에서 목으로 전기가 흐르며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 역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였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얇은 카디건 위를 연신 쓸어내렸다. 나는 그녀를 물에서 끌어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던 냉기와 힘이 잔뜩 들어갔으나 겉은 말랑했던 옆구리와 배의 촉감이 떠오르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속도를 높여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녀는 주춤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나저나 어디로 갈까. 이제 뭘 할까.’
이유를 묻지 못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묻기도 어려웠다. 그녀와 나는 그런 것들을 묻고 답하던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옆으로 물러선 그녀를 쳐다보다가 무연히 길을 따라 걸었다. 몇 걸음 뒤로 그녀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멀리 작은 공원이 보였다. 새벽임에도 공원을 걷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공원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광장 주변으로 설치된 계단식 스탠드로 걸어갔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한쪽 구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지판에는 ‘공원 전 지역은 금연구역입니다’라고 경고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녀는 검지로 표지판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가늘게 빛나는 눈동자 한쌍이 보였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손바닥을 내밀어 이리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 눈동자는 슬그머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말했다.
“고양이 키워본 적 없죠?”
그녀가 입술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다른 애들은 부르면 잘 오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믿죠? 다음에 보여줄게요.”
그녀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주변에는 흔한 자판기 하나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몇 미터 떨어져 있는 긴 나무의자로 가서 앉았다. 통나무를 반으로 자른듯한 모양새의 나무의자였다. 밤기운이 고스란히 스며있는지 앉은자리에서 엉덩이를 통해 한기가 올라왔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와 두리번거렸다. 내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밴치 끝에 걸터앉았다. 나는 문득 한숨이 나왔다. 아직 입김이 하얗게 서릴 계절은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내 오른손을 가져가서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녀의 손은 무척 차가웠다. 그녀의 손에 비하면 내 손은 시리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 냉기의 일부가 가만히 손등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얼음장 같던 손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안 추워요?”
그녀는 말없이 눈만 감았다 떴다. 그리고 머리를 어깨에 기댔다. 한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손이 고와요. 여자 손 같아.”
그녀가 손가락 마디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포개어 잡았다. 나는 왼손을 들어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가늘긴 했으나 손등은 거칠었고 손금이 깊이 파여 있었다.
“그렇게 봐선 몰라요. 손은”
그녀는 내 오른손을 잡은 두 손을 가슴까지 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살짝 숙여 볼을 비볐다.
“직접 만져봐야 알아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