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19)

19

by 작가 전우형

19.


시간이 멈춘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사흘 전 오전 10시경 20kg 생두 포대 아랫단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양쪽 모서리를 손이 아플 정도로 말아 쥐고 콧김을 뿜으며 포대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그 무겁던 것이 마법처럼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나서 8월 중순쯤에나 들었을 소나기 소리를 들었다. 녹색 알갱이들은 자욱한 연기를 피우며 시원하게 바닥으로 쏟아졌다. 나는 그저 그 황당한 장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던 모든 것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덜덜 떨리는 손가락 마디와 속눈썹까지도.


생두는 비쌌다. 최근 폭발적이고 경이로운 속도로 생두 가격은 폭등하고 있었다. 꺾은선 그래프의 가파른 경사처럼 내 입에서도 상스러운 언어들이 솟구쳐 나왔다. 낱알 하나하나 남기지 않고 주워야 했다. 나는 경건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양손을 바구니처럼 모았다. 생두를 긁어 담으며 생각했다. ‘반대쪽도 터지면 어떡하지?’ 생각도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무릎을 털며 일어났을 때 시간은 오전 11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후드 티 안쪽에서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탠드형 냉난방기에 전시된 실내 기온은 11도였다.


1년 전, 로스팅 드럼이 회전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투입하고 10분이 지난 후에야 알아차렸을 때도 그랬다. 지난 주말, 민트 프라푸치노를 계산대에 엎었을 때도 그랬고, 그것들로 흥건한 카드 리더기에서 신용카드를 뽑았을 때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손님을 앞에 세워둔 동안에도 그랬다. 행주를 두 개째 빨아가며 그것들을 훔쳐내는데 출입문이 딸랑거리며 두 팀쯤 되는 손님이 몰려들어와 앉을자리를 두리번거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지인의 말로는 스무디를 종류별로 스무 잔쯤(심지어 믹서기가 한 대 뿐이었다고 한다.) 주문한 단체손님이 통유리창 밖에서 제조과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녀의 볼이 닿았을 때 나는 무대 한가운데에 선 것처럼 조마조마해졌다. 관객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이고 마른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어제저녁부터 비바람이 거셌다. 공원 전체가 낙엽색 바다나 다름없었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사람 머리통만 했다. 곳곳에 수북이 쌓인 노란 은행잎은 여전히 끝을 모르고 떨어졌고, 개중에는 아직 연둣빛이 무성한 나무도 있었다. 지난 주였나? 커피를 내밀었을 때 낙엽을 쓸던 환경 미화원이 그랬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고. 이 끝없는 가을을 치우다 보면 겨울이 내린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내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훌훌 털어 마시더니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겨울만큼 더럽고 치사한 계절도 없다고. 눈은 하얀 이불보처럼 자비라곤 없다고. 연습한 대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꼭 그럴 때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이 비웃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말했다.


“고마웠어요.”


그녀가 손바닥 사이로 호 하고 바람을 불었다.


“실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미친 듯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시간을 건너뛴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녀와 있을 때가 그랬다.

꿈은 길었다. 1분 1초가 선명할 만큼. 엄지 끝에 남은 질감이 그랬다.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인 콧노래도 그랬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공원과 낙엽과 사람들과 가로등 불빛이 종이접기 하듯 가로세로로 무한히 접히며 하나의 점으로 모아졌다. 그 점은 끝없이 나를 밀어냈다. 커튼 사이의 작은 틈으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말아쥔 손에서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삐거덕거리는 손을 한동안 쥐었다 폈다 하다가 나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욕실에는 한기가 맴돌았다. 따뜻한 물은 한참을 기다려야 나왔다. 나는 이를 닦기 시작했다. 옷을 너무 빨리 벗었다고 생각했다. 식은땀으로 젖은 속옷을 대충 물로 헹궈낸 후에 나는 자욱한 수증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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