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22)

22. 힘 빼기

by 작가 전우형

22.


기억할 수 없지만 나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을 나빴다고 말하는 건.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연했다. 남아있는 모든 감각이 나쁜 일을 당한 것처럼 찜찜하고 괴로웠으므로. 그러니까 나쁜 꿈을 꾼다는 건 강도를 당하고 기억상실에 걸리는 것과 같다. 야구방망이나 각목, 퍽치기 같은 것으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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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빠져나온 나는 화장실로 가려했으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정수기 앞에 선 나를 발견했다.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참나, 자기가 자기더러 ‘모양’이라니.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나는 종종 제삼자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고 느꼈다.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재미있지만 신선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컵에 물은 찼다. 벌컥벌컥 마시는데 내가 어째서 화장실이 아니라 부엌으로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뇌가 부지불식간에 나의 다리를 움직여 부엌으로 이끌었다는, 뭐 그런 말이다. 단지 내가 정신이 외출 중이거나 몽유병에 걸린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하고 싶어서다.(그렇지만 대체 누구에게?) 우습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분석하는 건 오래된 악취미다. 오래되었다는 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과 동의어다. 실은 이런 말은 각주에 번호표를 달고 쓰여야 어울리겠지만. 오랜 친구와 마주쳤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절교를 마음먹은 게 아니라면.


아직 밤이라는 건 확실했다. 일단 베란다 밖의 풍경이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칠칠치 못하게 바닥에 흘린 물을 닦기 위해 물티슈 뚜껑을 여는 소리가 그랬다. 한밤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기라도 하듯 딸깍 하는 소리는 지독하게 크고 신경이 쓰였다. 더군다나 흘린 물을 닦으려고 물티슈를 뽑는 부조화 또한 내 정신세계의 현 소속을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물티슈로는 아무리 닦아도 물은 흩어질 뿐 줄어들지 않았다. 분석하자면 다분히 습관적인 반응이었을 텐데. 다만 지난번과 다른 건 이번 물티슈는 새것이라는 점이다. 물티슈 뚜껑은 사용자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늘 열린 채로 유지되었고, 바싹 마른 물티슈는 바닥에 흘린 물을 닦는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그래도 일부가 스며들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물이 뚝뚝 흐르는 물티슈를 다른 손으로 받친 채 싱크대로 가져가 주먹을 쥐어짰다. 꽤 많은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마른행주로 남은 물기를 훔친 뒤, 물티슈로는 식탁을 닦기로 했다.


식탁에 남아 있던 가루 찌꺼기가 말라붙은 일회용 패트 재질 약병이 손에 밀려 넘어졌다. 세라믹 재질의 식탁은 값비싼 스피커처럼 작은 소리를 서라운드로 재생하는 능력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식탁을 슥슥 밀어 닦는데 온갖 것들이 다 느껴졌다. 말라붙어 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얇은 물티슈 아래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랜 서식지를 하나하나 긁어내는 기분으로 박박 닦다 보니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시간은 겨우 12시 23분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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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그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흉내 낼 수도 없는 그 울음소리. 부모라면 수없이 들을 그 울음소리. 엄마들은 마치 세포가 알아차리듯 그 막연한 의성어의 집합 속에 숨은 메시지를 풀어낸다. 하지만 모든 엄마들이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걸까. 아니면 지쳐 잠든 걸까. 수수께끼는 밤이 깊을수록 번져간다.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는 배고픈 강아지처럼 구슬프다. 온순하고 얌전하며 적극적이다. 그리고 점점 복받치고 사나워져 간다. 마치 배신당한 연인의 울부짖음처럼 듣기 싫고 날카로운 모양새로 변한다. 이것은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적어도 아이에게 있어서는 생존을 위한 진지한 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이것과는 다르다. 그게 내가 조용히 그녀의 곁을 벗어나는 이유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온 발자국이 곧 사라지는 날을 골라. 원래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꿈처럼. 그래 꿈처럼.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건 그녀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 도둑처럼 몸을 웅크린 채 살금살금 빠져나가는 뒷모습이길 바라지 않으니까. 한편으로는 불가항력적인 마지막 인사를 나누길 원해서일지도 모르지. 모호한 상실감이 솜털을 간지럽히기라도 한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닐 테니까.


핑계에 가깝지만(아니, 확실히 핑계일 테지만) 인사는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실히 헤어지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여담이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가 마무리되지 못한 건 한번 잠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잠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떠나는 등 뒤로 깨어있는 시선을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나의 감각일 뿐이다. 실제로는 실눈을 뜨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저 모른척했을 뿐인지도 모르지.


모순이었다. 아주 지저분하고 역겨운 모순. 미련과 위안으로 시작된 관계는 처음부터 작은 접점조차 없었다. 갓길이나 졸음쉼터에서 잠깐 쉬어갔던 것뿐이라니. 잔인한 말이었다. 그래도 안가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던 사람에게 그건 확인사살이었다. 그러나 밤의 도로는 간간히 얼굴을 내밀 뿐이었다. 도망치는 건 오히려 너야,라고 텅 빈 도로는 말하고 있었다. 기회는 있었어. 머뭇거린 건 너였잖아. 그 망설임이 지금을 만든 거야. 오뚝이는 기댈 수 없어. 그건 옆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야. 네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 때문이지. 지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절망하기 때문이야. 해도 안된다는 걸 알고 나면 앞으로도 안될 거라는 걸 확실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기분에 불과한 것들이 점점 확정된 사실처럼 여겨져. 그럼 이런 생각이 들어. 낭떠러지에 발을 내딛으면 떨어져 죽는다는 걸 꼭 해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뇌게 돼.


곧게 뻗은 도로가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손과 발은 차갑게 식었으며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가속 페달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과 함께 나는 바싹 마른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굳어있던 포도 껍질이 점차 말랑해지며 부풀어 올랐다. 눈앞이 흐려졌다. 손등으로 문질러도 흐트러진 시야는 돌아오지 못했다. 둔탁한 충격이 여과 없이 전신을 관통하며 사방이 붕 떠올랐다. 의식을 잃었다, 고 느낀 건 사후 분석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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