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너무 늦었어
24.
“거짓말.”
발걸음이 멀어졌고 이내 사라졌다. 빈 공간은 또 다른 분주함으로 채워졌다. 병원은 늘 그랬다. 경각에 달한 생명들이 그렇듯, 다급하고, 여유가 없고,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달고 산다.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힘들지 않다고. 어쩌면 그 거짓말들이 그들을 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기를 피우는데도 땔감이 필요하다. 아무 일 없던 사람들이 병원에 실려오는 건 그런 이유였다. 땔감이 떨어졌다는 것. 상처를 숨길 수 없다는 것. 이제 더 이상은, 절망을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숨겨야 하는 말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말들을 작게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곤 했다. 버리면 안 됐다. 누가 주울 수도 있으니까.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펼쳐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태워버리긴 싫었다. 언젠가는 발견되길 바랐다. 삐죽 튀어나온 걸 보고 그게 뭐냐고 물어보길 원했다. 뒤늦은 위로라도 받고 싶었다.
**
“추억은 뭘까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5년 전 만난 고양이가 떠올랐다.
“문만 열면 집을 뛰쳐나가던 고양이 같은 거 아닐까요?”
그녀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예전에 고양이 한 마리와 같이 산 적이 있었어요. 털이 까맣고 눈이 하얀 고양이였죠. 8월 초였나? 열린 문틈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어요. 그 고양이는 신화 속 검은 정령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거실장 아래에서 저를 노려봤어요. 제가 다가가면 이빨을 드러내며 하얀 숨소리를 냈어요. 뭘 줘야 기분이 풀릴까. 부엌을 뒤적거려 황태포를 잘게 다져갔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어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선자리에서 상대방이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하고선 사라져 버린 기분이랄까? 문을 열어둔 채 한참을 더 기다렸어요. 하지만 밤이 다 되어도 그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어요. 자려고 누웠는데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얼른 문을 열어보니 집 앞에 내어둔 종량제 봉투 한쪽이 뜯겨있었어요. 저는 그 옆에 아까 다져둔 황태포를 놓아두었어요.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죠.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어요.”
“집사 노릇은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사흘째였나? 그 녀석이 또 들어왔어요. 정확히는 이미 들어와 ‘있었던’ 거죠.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건지, 스탠드 에어컨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저는 얼른 문부터 닫았어요. 그 녀석은 무덤덤해 보였어요. 어차피 그 위에 있으면 자길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저는 반가웠어요. 실은 그저께 주문했던 츄르가 도착해 있었거든요. 리뷰들을 보니까 고양이들이 사족을 못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녀석은 고양이가 아니었나 봐요. 팔을 쭉 뻗어 눈앞에 갖다 대도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그 하얀 숨소리. 그것만 계속해서 증기처럼 내뿜을 뿐이었죠. 나름 사나운 흉내라도 내어보려는 것 같았지만 저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어요. 너도 살려고 애쓰는구나. 뭐 딱 그 정도? 그렇다면 무서워해줄게. 저는 츄르를 간장종지에 꾹 짜서 에어컨 위에 올려두었죠. 거기서 하루쯤? 고양이는 잠만 잤어요. 귀와 꼬리가 늘 움직였죠. 접었다 폈다, 흔들흔들. 아무리 살금살금 다가가 보려고 해도 이미 꼬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죠. 마치 ”다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죠.”
그녀는 하품을 했다. 귀가 가끔 움직이는 게 그때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 미안해요. 지루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힌 뒤 기지개를 켰다.
“배가 고픈 것 같아요.”
**
나는 너구리 작은 컵에 물을 부었다. 어제 비가 온 뒤로 날은 꽤 쌀쌀해져 있었다. 서리가 내린지는 이미 한참 지났다. 겨울이 코앞이라고 늘씬하게 차려입은 기상 캐스터가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예언은 빗나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겨울이 올 것 같았다. 내내 손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느껴지는 한기는 진짜였다.
손을 후후 불던 그녀는 컵라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한 손씩 번갈아가며 볼을 비볐다. 나는 얇은 은박 같은 뚜껑을 열어보았다. 다시마가 불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김이 새어 나오는 너구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구리가 아니라 부엉이 같았다. 옆에서 후루룩-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왔다.
“불은 라면 좋아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요.”라고 하면서 그녀는 입안 가득 라면을 집어넣고 있었다. 내가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돌아앉았다. 나는 그녀의 등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무슨 뜻이었어요?”
그녀의 빨갛게 익은 귀가 까딱까딱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녀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뭐가요?”
“...”
“뭐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다시마가 불어 있었다.
**
“그래서 그 고양이랑은 어떻게 됐어요?”
“뭐... 그때부터 들락날락하면서 살았죠.”
“고양이들 한번 집 나가기 시작하면 계속 나간다던데.”
“맞아요. 그런데... 사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 녀석 입장에서는 감옥에 갇힌 걸 수도 있으니까. 붙잡아두려고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자유의지는 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문만 열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데. 너무 재빨라서 막을 수가 있어야죠.”
“돌아오긴 했어요?”
“네. 저 편할 대로 싸돌아다니다가는 문을 긁어댔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아빠들 밤새 술 마시고 새벽에 가족 이름 다 부르며 문 두드리는 거. 괘씸해서 문을 안 열어줄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다가 조용해지면 꼭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보게 되더라고요. 그럼 또 아주 도도한 걸음으로 방구석 어딘가에 똬리를 틀었죠. 한숨이 나와도 또 어쩌겠어요. 그 녀석 아니면 줄 곳도 없는 츄르 하나 쭉 짜서 놓아주는 거지. 화장실을 만들어줘야 한 데서 똥 모래도 사 오고. 그럼 또 알아서 거기로 달려가더라고요. 그러다 미운 식구가 된 거죠 뭐.”
“제 어릴 적 같네요. 좋겠어요. 그런 추억이 있어서.”
“희영 씨는 없나요?”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해가 따뜻한 오후였다. 하지만 오후의 햇살도 녹일 수 없는 쓸쓸함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밴치에서 일어섰다.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바닥 위로 얕게 깔린 자갈 모래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잘그락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거 아세요? 엄마들은 아이를 낳으면 죽는다는 거.”
“...”
“제 인생은 시작부터 거짓말이었어요. 아빠는 제게서 엄마를 그리워할 권리를 앗아갔어요. 그러고는 무책임하게 떠났죠. 혼자 생각했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죠. 그런데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세상이 절 속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어요. 모르겠어요. 무언가가 있었겠죠. 제 지나온 날들에도. 하지만 다, 거짓말 같아요. 전부 다.”
“거짓말.”
발자국 소리가 사라졌다.
“믿기 싫은 거였겠지. 믿을 수 없는 게 아니고.”
나는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넣어두었어야 했는데. 그녀가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안 그래요?”
그녀는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또 어디선가 '쿵' 하고 진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