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25)

25. 육교 위에서

by 작가 전우형

25.


희영이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은 정말 추억이 뭔지 아나요?”


희영의 목소리는 좀 전과 달리 날카로웠다. 희영은 한 발 더 다가왔다. 희영은 내 손을 강하게 잡은 뒤 가슴으로 가져갔다. 나는 움츠리며 손을 빼려 했지만 오히려 희영에게로 무너지듯 기울어졌다. 희영의 손은 자물쇠처럼 나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희영의 얼굴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희영이 말했다.


“그건 손바닥이 닿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그때 나는 차가운 기운 하나가 가슴 한가운데에 스미는 걸 느꼈다. 어느덧 그녀의 손바닥이 내 가슴에 닿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숨을 삼킨 뒤 길게 내뱉었다. 뽀얀 입김이 희영과 나 사이에 남은 좁은 공간을 아스라이 채워갔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희영의 가슴에 닿았던 수 초의 감각이 손바닥 전체를 지문처럼 감쌌다. 나는 딴소리를 했다.


“이건 극기훈련 같은 건가요?”


그녀는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제 기억 속에는 스탠드 에어컨 위에서 당신을 내려다보던 고양이 같은 게 없어요. 그 하얀 숨소리도, 언젠가 옆에 잠들었을 꾸덕한 온기도. 문을 긁던 자국과 소리도 오롯이 당신 것이죠. 물러서길 바란 건 아니었어요. 나는 나름의 대답을 한 거예요. 저는 사소한 균열이 마른 점토처럼 이어진 걸 느껴요. 언젠간 지금의 기억도 둘로 나뉠지도 모르죠. 그때 가서도 지금을 우리가 함께 추억할 수 있을까요?”


나비가 날아들었다. 그 나비는 시선을 따라 공간을 유영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나비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멀어졌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멀리서 나비의 날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오른손을 만졌다. 여전히 그곳은 부드럽고 딱딱하며 말랑하고 두근거리는 감각 속에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


초는 다섯 개다. 나는 그중 하나에 불을 붙인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매주 하나씩 새로운 초에 불이 붙는다. 각각의 초는 서로 다른 높이로 타오른다. 불꽃의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초의 시간은 줄어든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예수의 탄생을 기다렸다고 한다.


내리막은 가팔랐다. 내리막을 걷다 보면 간혹 덤프트럭이 제트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올 때가 있었다. 과속카메라 설치를 수차례 건의해도 아랑곳하지 않던 길이었다. 언덕 너머로 조금만 가면 같은 이름의 아파트가 8단지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이름의 아파트는 마지막 남은 부지에 십자 모양의 타워크레인을 세웠다. 해 질 녘이면 타워크레인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20톤 트럭을 모는 친구는 트럭은 내리막에서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갑자기 멈추면 실려있던 짐이 자신을 덮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덤프트럭의 경적 소리는 크고 웅장했다. 그들은 50km/h라고 쓰인 표지판을 우습게 지나치며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녀 앞에는 작은 여자 아이가 육교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육교는 절반은 경사로, 나머지 절반은 계단이었다. 여자 아이는 희영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했다. 이기는 사람은 열 계단씩 올라갔다. 희영이 연달아 세 번을 내리 이기자 여자 아이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멀어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희영이 손짓했다. 여자 아이는 얼른 뛰어올라갔다. 걸음이 제법 단단해 보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육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육교 위에서 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조금 전 걸어온 내리막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움직여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왕복 일 차선 도로를 따라 각양각색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중 멈추거나 어디로든 들어서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허름한 카페와 국밥집, 편의점 앞에 잠시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손에 들고 그곳을 나와 이내 혼잡한 행렬의 틈을 비집고 바삐 멀어져 갔다.


두 사람은 벌써 반대쪽 인도에 도착하고 있었다. 좁은 인도 가장자리로 은행 열매가 굴러다녔다. 밟히고 짓이겨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 은행 열매 특유의 코를 찌르는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논은 추수를 이미 마친 뒤였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볏짚을 모아둔 정사각형 모양의 원기둥 같은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벼의 밑동만이 을씨년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여자 아이는 까치발을 들고 은행 열매를 피해 휘청거렸고, 희영은 그런 여자 아이 뒤를 가만히 뒤따를 뿐이었다. 여자 아이는 손을 흔들고 길을 건너갔다. 아이는 이내 정문을 지나 운동장 저편으로 사라졌다. 희영은 뒷걸음질 치며 보이지 않는 곳까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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