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추위
26.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덤덤한 눈으로 쳐다봤다. 감각은 멀고 이상했다. 마취가 덜 풀린 입술을 혀로 핥았을 때처럼. 비 내리는 11월 아침, 쏟아지는 사람들에 밀려 버스에서 내린 여자가 우산을 펼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나는 그 찌푸린 눈매와 꽉 깨문 입술, 굵은 빗줄기, 어깨가 진해져 가는 얇은 감색 코트가 신경이 쓰였지만 그뿐이었다. 그건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장의 병사가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꼴이랄까. 지독한 고통은 유예를 거치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희영의 앞선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상실은 서서히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한참 동안 눈밭을 걷다 보면 발끝이 시리다 아프다 아무 느낌도 없어지듯이 나는 그렇게 시간을 두고 굳어갔다. 발바닥에서 뿌리가 뻗어 나와 밑창과 보도블록과 시멘트 바닥을 뚫고 단단히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솜털에 머물던 미세한 감각 하나하나가 차갑게 식어갔다. 몸이 무거웠다. 더없이 육중한 중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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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은 무용하며, 건너뛸 수도 있었다. 비단 과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달리는 내내 한 곳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창문을 내렸다. 바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폭죽이 끝없이 터지는 콘서트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소리는 고막을 그대로 통과하여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옆을 달리는 자동차들은 자꾸만 뒤로 갔다. 나는 무연히 앞을 바라보았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곳은 하나의 교차점이었다. 그 작고 따뜻한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 시간의 밀도가 짙어졌다. 색을 덧칠하고 덧칠하고 또 덧칠하다 보면 스케치북에는 작은 빈틈조차 남지 않았다. 공주대교 위로는 수많은 차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시간에 쫓기듯 달렸다. 그들에게는 목적지가 있었다.
나는 머물기를 원했다. 그곳에 앉아 금강이 억지로, 억지로 시간이 떠밀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에는 틈이 있었다. 시간에 쫓기지도, 밀리지도 않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진 졸음쉼터 같은 공간이. 나는 17년 전, 늘 거기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양 무릎 사이에 파묻고 바람 빠진 공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거기 머물렀다. 그녀의 흐느낌에는 멜로디가 있었다. 나는 마치 그 소리가 피아노 연주처럼 들렸다. 뒤에서 조명이 비췄다. 우리의 그림자는 물살 가운데에 기둥처럼 세워진 교각에 작은 앉은뱅이 동상처럼 맺혔다. 하나는 고개를 숙였고 다른 하나는 늘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나를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면 마른 자국이 묻어 나왔다. 방해할 수 없는 슬픔이 좋았다. 우리는 허기를 면하듯 슬픔을 나눠먹었다. 실컷 울고 나면 배가 고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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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곳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산책로가 형성되고 벤치가 생겼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부모와 아이, 친구와 연인들은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탔다. 일부는 귀에 무언가를 끼고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다 가끔 부딪히기 직전에 멈춰 서면 흘깃 쳐다보고는 눈을 피했다. 그리곤 말없이 몸을 비틀어서 지나갔다. 간혹 뒤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나는 초를 켰다. 어깨너머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옥상에서 몰래 신문지에 불을 붙인 아이처럼 조마조마해졌다. 빈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가 시렸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초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머무를 곳을 점점 잃어가는 것 같았다. 모래성의 깃발을 넘어트리지 않기 위해 경쟁하듯 조심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손끝으로 모래를 살살 긁어내다 보면 가지처럼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러다 보면 정작 누가 흙을 더 많이 파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더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깃발을 초조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앉은 자국이 보였다. 나는 엉덩이를 탁탁 두드렸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인사하듯 기침이 나왔다. 목이 까끌거린 건 아니었다. 얼마나 오래 아무도 앉지 않았던 걸까. 그 녹색의자는 산책로에서 벗어난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금속 재질의 나사와 프레임이 드러난 곳도 있었다. 나는 휴대용 물티슈를 꺼내 의자를 닦아주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까맣게 먼지가 묻어났다. 한참을 반복해서 닦았다. 몇 장 들어있지 않은 휴대용 물티슈는 금세 동이 났다. 아직 덜 닦았는데. 서너 걸음만 가면 물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나는 발이 물에 닿기 직전까지 걸어가서 상체와 양팔을 쭉 내밀었다. 닦은 물티슈를 물에 담가 대충 흔든 뒤 물기를 적당히 짜냈다. 나는 의자를 마저 닦았다. 어두컴컴해서 보일 리 없는데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것 같았다. 손등이 따갑고 손가락 마디는 삐걱거렸다.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쥐었다 폈다 했다. 너도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구나. 그동안 아무도 앉아주지 않았겠지? 나는 코끝을 매만졌다. 낡은 의자가 여기서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