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27)

27. 엽서

by 작가 전우형

27.


“그 사람은 늘 늦어요. 약속을 잘 잊어버려요. 그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자라목을 빼고 밖을 쳐다보게 돼요. 바람에 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죠. 처음에는 기다리는 것도 좋았어요. 기다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두 번 돌아보았다.


“기다린 만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어요. 마치 눈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달까. 그 사람이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걸어오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아요. 그 장면을 사진처럼 담아두는 게 좋았어요. 불편하지 않았어요. 정말로요.”


그녀는 손에 쥔 커피잔에서 잔떨림이 일었다.


“그러니까 그런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사랑을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문득 벽걸이 시계로 눈이 갔다. 아무에게도 귀속되지 못한 채 흩어져가는 그녀의 시간들을 보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휴대전화는 원래부터 그렇게 놓여 있었던 것처럼 티 나지 않게 다시 까만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고요히 무언가를 삼켰다. 나 역시 무언가를 삼켜야 했다. 입속에 연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 연기는 압축되고 또 압축되며 굳게 다문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압박해왔다. 그것은 차가운 덩어리처럼 굳어졌다.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주먹으로 두 번, 툭툭 명치를 두드렸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아까 먹은 주먹밥이 체했나 봐요.”


나는 쌓인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커피잔 3개, 접시 2개.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수세미질을 했다. 물줄기가 졸졸 흐르는 소리와 잘그락거리며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또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더 뽀득뽀득 커피잔을 문질렀다. 물이 차가웠다. 이제 보일러를 틀어야 할 것 같았다.


**


흉터는 종종 시간이 흐를수록 커진다. 연해지기도 하지만 햇빛에 타면 그곳만 색이 변한다. 보통은 긴 팔을 입거나 토시 같은 걸로 가린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언제 다친 상처냐고. 어떻게 다친 상처냐고. 누구한테 다친 상처냐고. 그 질문들을 대충 얼버무려도 한번 떠오른 기억들은 가라앉지 않는다. 사월의 안개처럼 자욱하게 사방을 둘러싼다. 떼어내는 게 아플 만큼은 아니었는데. 자꾸만 그곳이 가렵고 신경 쓰였다. 긁으면 피가 났다. 나 역시, 기다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겨보면 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처럼 결말을 미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결과를 모르면 확률은 반반이니까.


위안은 주로 몸부림이었다. 화장실 바닥에 낀 물 떼를 지우거나 뒤섞인 재활용 플라스틱을 정리하는 일. 막힌 채수 통을 뚫거나 냉장실 벽의 얼음덩어리를 떼어내는 일. 전달하지 않을 편지를 쓰고 혼자 몇 번을 읽어보거나 핸드드립을 내린 뒤 맛의 변화를 하나하나 기록하는 일. 시든 카랑코에를 옮겨 심은 뒤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읽은 책에서 좋았던 페이지를 접고 날짜와 시간을 적어두는 일. 시간과의 무모한 싸움을 계속하는 일.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화들을 관찰하는 일. 그리고 그 시간이 나를 변화시키길 기도하는 일.


고독이 몇 개인지 세지 않으려면. 뜨는 해를 보며 잠들지 못한 지난밤을 곱씹지 않으려면. 하얗게 탈색될 만큼 긴 하루에 풀어헤쳐지지 않으려면. 같은 페이지를 열세 번째 다시 읽지 않으려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그리워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의미 없는 일이라도.


**


만년필에 잉크를 새로 채웠다. 획이 가늘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실은 그게 마지막 안간힘이었나 보다. 비가 오면 소란을 밀어주어 좋았다. 선선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속도를 높였다. 올챙이처럼 꼬리를 흔들며 밖으로 밖으로 멀어지는 빗물방울을 보며, 도망치기 위해, 다가가기 위해 달렸다.


날이 추워졌고 허기는 시시때때로 나를 찔렀다. 따뜻한 무언가가 절실했고,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탄수화물과 나트륨에 취해 면발과 국물을 한껏 들이켜고 나면 목이 탔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곧 목젖에 풍선껌이 달라붙은 느낌이 다시 들었다. 같은 과정을 서너 번 반복하고 나면 비로소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넌지시 궁금해졌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누구와 있을까? 점심은 먹었을까? 일은 언제 끝날까? 질문들을 옮기며 이리저리 어수선하게 거리를 쏘다녔다.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공기가 많이 상해있었다. 상한 공기를 마셔서 나도 상했나. 담배냄새가 날아들었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건물 한쪽 구석에서 흰 연기가 피어나는 게 보였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나뒹굴었다. 허리 굽혀 줍는데 나도 모르게 끙하는 소리가 났다. 진한 녹색 점퍼에 낡은 코르덴 바지, 먼지 묻은 안전화를 신은 두 남자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옆으로 금연구역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꽁초를 발로 비벼 끈 뒤 침을 뱉고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꽁초를 줍는 내 뒤로 스치듯 지나갔다. 담배와 먼지 냄새가 섞여 났다. 헛기침이 나왔다. 나는 중얼거렸다.


“흡연구역은 반대쪽인데.”


두 사람의 발 뒤꿈치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누구보고 치우라고 이따위로 버려두고 가는지. 쯧...”


나는 발로 담배꽁초들을 쓱쓱 긁어모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됐다. 뒤에서 뭐라 중얼거리다가 차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또 중얼거렸다.


“예의들이 없어.”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해 여름(28)